주섬주섬 일상 털이
지금은 사라진 성북동 카페 페인트커피앤바
동네에 ‘페인트커피앤바’라고 꽤 괜찮은 카페가 있었는데 사라졌다. 좋았던 것들이 이렇게 불시에 사라져 버리면 허한 마음이 든다. 생각도 마찬가지.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은 많았으나 결국 모든 것이 사라졌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몇년째 이런 후회를 반복하면서도 나아지지 않으니 기록을 해보자는 다짐도 이제는 좀 머쓱하다. 그래서 이렇게 강제(?)적으로라도 무언가를 적어야 하는 일이 반갑다. 나름대로 많이 보고 듣고 느낀 한 달이다. 제 일상을 소개합니다. 두둥.
#여행
사진첩을 열어보니 대략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 사진이 주를 이룬다. 지난 한달 간 여행을 많이 다닌 덕이다. 아기를 키우니 날씨에 민감해지는데 나가 놀기 좋은 계절은 지금 이때뿐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쏘다녔다. 강릉, 포천, 영월, 제천(영월과 제천은 매우 인접해서 가는 김에 같이 간 건데 많이 다닌 것처럼 보이려고 다 풀어썼다^^)을 다녀 왔고 10월 말에 원주로 단풍 구경을 갈 계획도 있다. 이 모든 건 그간 아기가 크게 아프지 않았던 덕분이니 일단 아기의 건강에 축배를 올려 본다.
먼저 예상보다 좋았던 곳은 강릉, 강릉은 비교적 잘 아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출명소 정동진조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사실 정동진이 강릉인지도 몰랐다. 숙소가 정동진 근처인 옥계해변에 있어 유명하다는 정동진 레일바이크도 타 봤는데 레일바이크는 사실 별로였고(너무 시끄러웠기 때문) 정동진의 그 푸른 쪽빛 바다는 지금 떠올려도 좋다. 일출명소라는 유명세에 비해 고즈넉한 바다라는 점도 좋았다. 숙소가 있던 옥계해변 근처는 서핑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은지 군데군데 이국적인 가게가 있던 것 또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역시 바다하면 해수욕장, 카페거리로 유명한 강릉 안목해변은 관광지답게 맛집, 카페,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는 데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떠들썩했다. 예쁜 바다 풍경은 기본. 안목해변 그네의자에 앉아 백사장을 바라보던 것도 참 좋았다.
정동진 바닷가
지금 사는 곳이 경기 동북부로 금방 빠질 수 있는 곳이라 포천도 차로 한 시간 거리길래 이 정도면 당일치기로 무리는 아니겠다 싶어 다녀 왔다. 마침 포천에서 한탄강 축제(정확히는 한탄강 가든페스타)도 한다고 하고 포천 아트밸리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한탄강 축제는 나쁘다기 보다 요새 많이 하는 지역 축제의 전형(오만한 소리 죄송합니다ㅠㅠ)이었지만 대여한 자전거로 축제가 열리는 생태경관단지를 달리는 걸 아기가 너무 좋아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밭의 풍경 자체는 사실 전에 갔던 철원 고석정 꽃밭이 더 감탄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포천 아트밸리, 이곳은 아주 오래 전에 회사에서 문화연수로 갔던 곳인데 다른 것은 딱히 볼만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채석장을 개조해 만든 그 계곡 만큼은 비록 인공적이지만 장엄한 맛이 있어 언젠가 또 오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별로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인공 계곡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여전히 그냥 평범했다. 다만 인공 계곡은 여전히 너무 좋았다. 과거 기억의 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기와 같이 온 다른 가족들과 소소하게 인사하고 얘기 나누며 뻥튀기도 얻어 먹었는데 그게 또 기억에 남는다.
포천 아트밸리
영월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이다. 엄연히 유배지인지라 들어갈 때에도 (비록 5분도 안 걸릴 짧은 거리지만)배를 타야만 한다. 배에서 내리면 야트막한 산과 강이 어우러진 장관을 마주하는데 이 풍경은 굳이 영월이 아니어도 그저 가평 정도의 교외만 나가도 마주칠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노송의 군락지가 펼쳐지고 소나무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곳곳에 스며든다. 그중 단종이 슬퍼하는 모습과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관음송’이라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데 이 관음송을 보며 애상에 빠지는 것도 한번 쯤은 해볼 법한 경험이다. 그리고 만일 청령포를 간다면 거기서 차로 10분쯤 걸리는 선돌이라는 기암까지 가보는 것을 권한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 사이로 우뚝 솟은 기암절벽이 꽤 장관이다. 다만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의 기암절벽이 그 선돌 단 하나뿐이라(여러 개였으면 좋았을텐데(?)) 엄청난 풍경이 하염없이 펼쳐지고 그런 느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제천에서 기억 남는 것은 카페 산, 패러글라이딩으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카페와 베이커리는 요새 유행하는 교외 대형 베이커리의 그것이라 그다지 말할 것이 없고(나쁘다는 것이 아님) 풍경은 역시 좋았다.
가평 정도의 교외만 나가도 볼 수 있지만…
선돌
이것이 여행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오늘 또 경기도 양주의 나리농원이라는 곳엘 다녀 왔다. 천일홍 축제가 열린다는데 포천 한탄강 축제도 그렇고 꽃을 테마로 한 국내 축제는 어디든 비슷한 것 같다.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축제를 위해 인위적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면 오히려 가볍게 나들이 할 만한 곳이 많아진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어찌 됐든 나리농원 천일홍 축제에 대해 할 말은 없고 오늘 먹은 점심! 돈까스 클럽이 기억에 남는다. 돈까스 클럽하면 한창 짤로 많이 돌아다니던 ‘재벌들의 상견례 장소’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실제 가 본 양주 돈까스 클럽은 그렇게 우스갯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꽤 좋았다. 메뉴도 다양하고 인테리어는 물론 정원도 예쁘게 가꾸어 놓았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돈까스도 맛있었다! 뭐 재벌들이 여기서 상견례를 하진 않겠지만…
양주 돈까스클럽 본점의 위엄
#케이팝
(나이가 드러나는 대목이지만)라떼는 ‘케이팝 열풍, 과연 지속 가능한 현상일까’ 따위의 질문으로 케이팝의 인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이 많았었다. 에.. 그러니까 약 15년 전 쯤 내가 언론고시를 준비할 적만 해도 프랑스에서 소녀시대가 인기가 있네, 샤이니도 난리가 났네, 해외에서 케이팝이 어쩌네 저쩌네 해도 그건 그저 당장 반짝하는 현상일 뿐 케이팝 열풍이라는 게 정말 실체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꽤 있었기에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논술 주제로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새삼 그런 걸 묻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케이팝의 위상이 공고해진 걸 느낀다. 그리고 이때싶 감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요즈음의 케이팝은 퍼포먼스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성으로 따져보아도 숫제(박완서 쌤 글도 그렇고 요즘 읽는 소설에서 ‘숫제’라는 표현이 자주 나와 꼭 써먹고 싶었다!) 영미권 팝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느껴지기에(라고 썼지만 케이팝도 잘 모르고 영미권 팝도 잘 모릅니다ㅠㅠ)최근에 자주 듣고 또 좋아하는 케이팝에 대한 잡담을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아 본다.
먼저 뉴진스, 요즘 뉴진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몰랐다 내가 이렇게 뉴진스를 좋아하는지. 4월에 배임 뭐시기 사건이 터질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어서 하이브 모냥 빠지네 하면서 가볍게 관전하는 마음이었는데 뉴진스의 향후 활동 자체가 불투명해지고 나니 ‘아 안되는데 나 뉴진스 음악 계속 들어야 하는데’ 생각이 들면서 괜히 혼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뒤늦게 굿즈도 사고 이제껏 단 한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더쿠의 케이돌 카테고리도 들락날락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아직도 어텐션의 그 충격이 생생한데. 들으면 들을 수록 버블검과 하우스윗이 얼마나 귀에 감기는데. 뉴진스로 시작해서 ASAP로 끝나는 두번째 EP앨범은 또 얼마나 유기적으로 탄탄한데. 여론이 뉴진스에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이런 좋지 않은 이슈로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뉴진스의 이미지를 소모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아 제발 내 뉴진스 그만 좀 괴롭히고 돌려달라고요ㅠㅠ
그런가 하면 르세라핌과 아일릿도 좋아한다. 하이브가 진짜 어리석은 행보를 걷고 있다고 느껴지는 게 르세라핌과 아일릿도 각기 다르게 진짜 좋은 그룹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말 그대로 걸그룹 명가가 되었을 텐데. 현 사태가 벌어지기 전만 해도 케이팝 알못인 나는 뉴진스에 르세라핌에 아일릿까지, 진짜 하이브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르세라핌은 비록 안일한 레퍼런스가 느껴지는 곡도 몇 있지만 뉴진스와는 다르게 최첨단 팝을, 그러니까 팝을 흉내내려고 하는 케이팝이 아니라 케이팝인데도 동시대 가장 유행하는 팝에 뒤지지 않는 사운드를 구현했고(쉽게 말해 자라나 흐앤므에 나올 법한!) 아일릿 역시 제작 포뮬러는 뉴진스를 표절했을 수 있겠지만 음악과 추구하는 색은 피프티피프티와 맞닿은(나는 사실 아일릿이 뉴진스보다는 피프티피프티와 비슷하다고 느끼고 그런 의미에서 흔히들 뉴진스를 이지리스닝이라 말하지만 나는 뉴진스는 이지리스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뉴진스는 스타일이 이지한 것이지 음악에는 모종의 긴장감과 도전적인 느낌이 있다.) 아주 듣기 좋은 이지리스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 다른데 다 매력있었다. 얼른 아무 찜찜함 없이 뉴진스, 르세라핌, 아일릿 이 세 그룹의 음악을 즐기기를 원할 따름이다.
그리고 요즘..도 아니고 거의 6개월 전부터 빠져있는 음악, 우즈의 음악을 애기해야겠다. Drowning(영타 귀찮으니 이하 드라우닝)을 처음 듣고 완전히 반해버려서 우즈의 곡들로만 플레이리스트를 꽉꽉 채워 한참을 듣다가 벗어나려던 차에 또 보고 만 것이다. 그가 군복입고 부르는 드라우닝 라이브 영상을. 하 우즈 음악 안 듣는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우즈에 훅 빠져들게 된건 이렇다. 일단 드라우닝이 너무 좋았고 드라우닝이 속한 앨범이 곡들도 좋지만 통으로 듣기에 유기적으로도 좋았다. 그뿐인가, 듣다 보니까 락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앤비도 잘하네? 엥 랩도 잘하네?? 에엥 춤도 잘추네??? 아니 못하는 게 뭐지 미쳤다. 김치찌개 맛집인 줄만 알았던 맛집이 알고 보니 울프강 스테이크 급 스테이크도 내놓는다니. 이렇게 되면 믿고 듣는 수밖에 없다. 우즈의 전 곡을 다 들었고 고작 두, 세개 정도의 곡들만 빼놓고 전부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전역하고 나서 콘서트를 연다면 꼭 한번 가는 것이 작은 소원이다.
케이팝 얘기를 하다보니 할 말이 너무 많다. 케이팝의 양대 산맥, 아이유와 태연 얘기도 하고 싶고 꽤 오랫동안 좋아했었던 페퍼톤스와 내가 좋아하는 밴드 사운드도 그리고 (내기준)당대 최고의 여돌 레드벨벳 얘기도 하고 싶다. 까먹지 말고 언젠가 이 이야기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늘어놓고 싶다.
#(아직)읽지않은책
읽은 책이 아니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맞나 싶지만 남는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내 일상의 아주 소중한 순간이므로 이것도 짧게 기록해 본다. 도서관에서 다섯 권의 책을 빌렸다. 첫 번째는 그레이스 M.조의 <전쟁 같은 맛> 이 책은 예전부터 너무 읽고 싶었는데 마침 대출가능한 책이라 누가 빌려갈까 후다닥 빌려왔다. 기지촌 여성이었던 엄마와 상선 선원이던 미국인 아빠를 둔 저자가 엄마의 조현병 발병 이후 엄마의 과거를 알게되면서 써내려 간 이야기이다. 아직 조금밖에 안 읽었는데도 흡인력이 상당하다. 이 글만 읽어도 자연스레 여성, 인종, 소수자 문제 그리고 국가가 개인에게 휘둘렀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눈이 뜨인다. 책을 읽으며 전에 없이 사회학에 관심이 생기기까지. 사회학자인 저자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그러나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의미를 던져 주는 글이다. 더불어 떠오르는 글로는 최은영의 <밝은 밤>,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가 있고(물론 이 둘은 소설이고 주제도 전혀 다르지만 거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서 여성의 삶을 조망해 본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엮어서 짧게라도 리뷰를 쓰고 싶지만 과연 그게 언제나 되려나.
두 번째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결혼기담>과 <유리의 살의> 아키요시 리카코는 <작열>과 <절대정의>로 알게된 작가인데,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구성되거나 혹은 1인칭 시점이 번갈아 가며 나오는 미나토 가나에 류의 전형적인 일본 추리소설 작가이지만 앞선 두 작품이 킬링타임용으로 상당히 좋았기에 빌려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뇌를 비우고 재미로 보기에는 일본 추리 소설 만한 것도 없는데 종종 일본 추리 소설이 선정적이고 불쾌감을 주는 것에 비해 이 작가의 작품은 그런 것도 없어서 이 두 책도 좋다면 앞으로 아키요시 리카코의 책은 다 빌려볼 것 같다.
세 번째는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아마 백수린 작가의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추천한 책이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 갔다 우연히 눈에 띄어서 빌려온 책. 추천 내용도 기억이 안나서 아무 사전 정보가 없지만 그냥 좋은 책일 것 같다.
네 번째는 유키 하루오의 <교수상회> 지지난 무임승차에서 추천 받은 작가의 작품이라 골랐다. <방주>가 더 읽고 싶긴 했는데 방주는 죄다 대출 중이어서 빌릴 수가 없었던 고로.
그리고 또 바보 같이 상호대차 신청을 해 놓고는 수령 도서관을 잘못 설정해 못 빌린 책 두 권이 있다.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돌의 내력>과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돌의 내력>은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너무 좋았다는 기억만 있다. 국내 출간된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책 딱 두 권 <돌의 내력>과 <손가락 없는 환상곡>이 둘다 아주 좋았는데 그 좋았던 기억에 비해 블로그 리뷰도 많이 없어서 다시 한번 읽고 감상이 달라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맘이다. 그리고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왠지 영화 <케빈을 위히여> 같은 찜찜함이 있는 책일 것 같아 미루다가 빌리기로 결심, 하지만 수령도서관을 잘못 설정했으므로 다음 기회에…
일상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었는데 의미도 재미도 없는 글이 너무 길어졌다. 여기까지 다 읽어 주셨다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ㅠㅠㅠㅠ 허접한데 길기까지 한 일상글을 읽어 준 당신에게 오늘 하루 축복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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