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스터도 오타쿠도 인텔리도 될 수 없지만

 

힙스터가 되기엔 감각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다. 오타쿠가 되기엔 과몰입이나 열정이 한끗 부족하다고 느낀다. 인텔리가 되기엔 지식적 역량이나 공부를 향한 노오력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 모든 방향으로의 욕망은 상시 존재해서 늘 맛보기 스푼을 품고 여기저기 간을 보러 다닌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쩝쩝거리며 나타나는' 강아지 짤과 같달까. 그리하여 이번달의 삼갈래 맛보기 스푼에 대한 감상을 고합니다.



론 뮤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4월부터 진행중인, 작가 론 뮤익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론 뮤익은 예전 리움 전시에서 처음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나 진짜같아 도리어 가짜같은 그 리얼리티가 유독 인상적이어서 흥미를 갖고 있었다. 사실 예술사적 의의나 작품 개별에 담긴 함의같은 것은 잘 모른다. 그러나 작품 관람 자체만으로 흥미로운 경험인 건 제법 보편적인 느낌인지 인기가 어마어마해서, 평일에 겨우 방문할 수 있었다.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론 뮤익의 작품 수는 10여 점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작가가 직접, 손수 작업을 하는데다 아주 정밀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과작할 수밖에 없는 걸 고려한다면, 작가 전생애의 작품세계에서는 꽤 높은 비중일 것이다. 과연 하나 하나 들여다볼 때마다 콧털이나 팔꿈치의 주름같은 것들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 보자면 어딘가 익살스러운 면도 있다. 예를 들어 속옷 차림의 중년 아저씨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닭과 대치하는 작품 '치킨 맨'을 보면 그렇다. 


반면, 움푹 들어간 공간에서 줄을 서야만 볼 수 있는 '어둠 속에서'는 기괴함과 음산함이 느껴진다. 한참 줄을 선 뒤에 볼 수 있는 것 치곤 애걔 싶기도 하다는 점에서 로마의 진실의 입같기도 하고 놀이동산의 공포 체험같기도 하다. 심연의 무언가를 마주하는 느낌에서 니체의 명언을 떠오르게도 하고,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은 압도감이 들기도 하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들까지 보다 보면 절로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래도 역시 하이라이트는 '매스'이다.


여러 개의 해골들이 약 14미터에 이르는 벽의 끝까지,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의 앞뒤에 쌓여있는데,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이 극대화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진짜 해골을 쉽게 볼 수 없으니 대조해보기도 어렵고. 그래서인지 첫인상은 다소 붕 뜬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사진을 찍기 위해 그 한가운데로 한발짝 내딛으면서 어딘가 불안감이 밀려오고, 허무함이나 낯선 위화감같은 것들이 고조된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천장쯤에 다다르면 창문이 보이고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랄까, 맥이 풀리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론 뮤익은 전시될 장소에서 이 창이 존재하고 그 너머가 보이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론 뮤익의 전시는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도 제법 스펙터클하고 다이나믹한 생각과 감정의 파고를 느끼게 한다. 전시는 7월13일까지이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서촌 나들이 다녀오는 것을 추천.




썬더볼츠* (꼭 별을 넣어줘야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이니까 일단 꼭 넣어줘)

마블 영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있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관객수가 1,100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가 딱히 특별한 호감을 지닌 것 같지는 않다. 제법 의리있게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까지 따라오기는 했지만,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는 하나도 보지 못했으니 역시 덕후 테스트는 탈락일 것이다. 그럼에도 1,100만에서 거르고 걸러져 남게 된 92만 중 한 명으로서 고백하자면, 썬더볼츠*는 단순히 정이나 의리의 작품은 아니다. 영화관에 들어설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다 보고 나오는 순간은 다를 것이다.


대단한 스토리, 강력한 빌런, 어마무시한 CG나 화려한 액션이 나오진 않는다. ...솔직히 사심을 섞자면 개쩌는(!!!!) 액션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어쩐지 슈퍼히어로든 그 목표나 행위 자체든 스케일이 우리들의 친절한 (그리고 귀여운) 이웃 스파이더맨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멀티버스나 플립 등등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하며 리터럴리 우주 너머로 가버린 MCU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솔깃할 수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캐릭터들도 흥미롭다. 그들은 히어로보단 안티테제에 가깝다. 굳이 꼽자면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느낌이라고 봐야 할까. 개인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오갤의 제멋대로 환장 케미에 가깝다고 느껴지긴 했다. 분명 호감일 수만은 없는 캐릭터들인데 이상하게 귀엽고 이상하게 스며든다. 어이 없는 웃음도 웃음의 효과가 있듯이.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당신은 그 모든 세월과 서사를 거쳐 홀로 우뚝 선 버키를 만날 수 있다. 브뉴월에서 몇 초쯤 만날 수 있던 버키보다 좀 더 생생하고 현실적이고 귀여운 버전의 버키다. 다음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어벤저스가 더 나올 계획이라니 그런가보다 싶다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보낸 수많은 히어로들이 떠오른다. 때로 허망하게 때로 화가 날 정도로 보냈던 것처럼 그나마 아직 남아주어 위로가 되었던 버키와 그 옆의 캐릭터들마저 잃을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까지 얘기해놓고 보니 덕후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진료차트 속에 숨은 경제학

아직 완독은 못했지만, 최근 읽은 것 중 가장 나의 지적 호기심을 끓어오르게 한 책이다. 미국의 악명높은 의료보험 때문인지 의료 제도가 우리나라와 완전히 다를거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 책이나 뉴욕 검시관의 하루 같은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사람 사는 곳이고, 전문 기술을 다루는 곳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진료차트 속에 숨은 경제학은 의학박사이자 경제학박사인 저자 두 명이 자연실험을 통해 흥미로운 가설을 수립하고 검증하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보스턴 지역의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의 환자가 그렇지 않은 날의 환자보다 사망 확률이 높다든가, 미국의 학기 기준으로 8월에 태어난 아이들이 ADHD를 판정받은 확률이 높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난 이러한 류의 책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례 중심이기 때문인지 굉장히 잘 읽힌다. 그래서 내가 말콤 글래드웰을 좋아하기도 하고. 물론 말콤 글래드웰을 비롯해 그와 비슷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직업의 목적 자체가 읽기 쉬운 글을 쓰는 것이니 쉽게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역시 이런 글을 읽다보면 미국의 대학들에서 '에세이'를 요구하는 게 이래서일까? 싶기도 하다. 어떤 공통적인 소양으로 인정되는 것 같달까.


두번째 이유는 새롭기 때문이다. 사람 취향과 수준은 노력하지 않는 한 그 자리에 머물기 때문에 근 몇 년간 나는 늘 읽은 얘기만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책을 만나면 너무 신이 난다. 관점을 달리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좀 더 넓고 깊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만 같다. 언뜻 보면 뻔한 말 같은데 그걸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내는 과정이 아름다울 때도 있고, 아니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싶은 때도 있다. 커리어 그리고 가정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중도하차했지만...) 느꼈는데, 경제학이란 게 붕 떠 있거나 유리되어 고고한 학문이 아닌 것 같다. 앞으로도 비슷한 책을 좀 더 찾아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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