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과 가능한 불가능
제목에서부터 짐작되다시피 그렇다. 이번에 읽고 싶은 책은 지난 호 뉴스레터에 소개되었던 ‘가능한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너새니얼 호손은 또 뭐냐고. 역시 지난 호에 소개했던 책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의 한 챕터 ‘집에서의 호손’을 읽고 소소하게 다짐한 것이 있기에 그 다짐을 지켜보고자 가능한 불가능의 영역에 그것을 욱여넣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현재 독박육아 중이다. 사실 ‘독박육아’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첫째 ‘독박’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불쾌한 어감, 둘째 ‘내가 독박육아를 한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해도)남편의 육아 참여도가 높지 않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자니 스스로가 몹시 초라해지니까. 아무튼 찾아보니 독박육아라는 말 자체에도 여러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나 혼자 보낸다’ 정도의 중립적인 뜻으로도 이 말을 대체할 다른 말이 없으니 일단은 내가 독박육아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기를 낳고 난 후 육아가 마치 여성의 일인양 구구절절 고충을 토로하게 되어 애석하지만, 육아를 하면서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기는 잠을 많이 자지만 아기가 자는 시간이 곧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는 동안에 쉴 새 없이 뒤척이기도 하거니와 울면서 깨는 일도 종종 있어 마음 놓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설령 푹 자는 것 같더라도 이유식 만들기 같은 소소한 일들은 계속해서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물론 정말 그렇게 틈이 없느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지만 타고난 에너지가 적고 체력도 정신력도 약한 나로서는 글을 쓴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 뉴스레터에 쓰는 글 또한 말이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하던가, 따지자면 그런 것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언감생심 완벽주의자라니, 언제 글을 그리 잘 쓴 적이 있었느냐마는 그래도 잘 쓰고 싶은 것이,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못할 바에야 아예 쓰지 않아버리면 ‘쓰면 잘 쓸텐데’ 합리화라도 가능할테니 그 편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어찌 보면 ‘육아 중’이라는 것 만큼 간단하고도 잘 통용되는 핑계도 없으니 모두의 너른 이해를 받으며 안 써도 그만인 상태로. 한편으론 육아를 핑계삼아 허접한 글을 써도 되냐고 묻고 싶기도 했는데 그건 ‘괜찮다’는 답변을 바라고 하는 너무 비겁한 행위 같아 일단 내가 뉴스레터에 글을 싣고 싶은지 그 마음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쓰고 싶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그리고 기왕이면 잘 쓰는 것.
그렇게 내심 마음을 굳히고 지난 호 뉴스레터를 읽는데, ‘가능한 불가능’에서 거는 목표가 마치 나의 다짐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은 올해의 목표는 일단 하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글을 쓰는 것으로. 그리고 적어도 뉴스레터에 밀리지 않고 글을 꼭 싣는 것으로. 아마 앞으로 쓰는 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처럼 육아의 고충 운운하며 그다지 괜찮은 글을 못 쓸 가능성이 크지만 해내고자 마음 먹은 일을 해내는 것만큼 드물고 값진 경험도 없다. 어설프지만 어쨌든 해낸다면 남은 기간 동안의 연재(?)가 나에게도 또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한다.
관점을 달리하자면 육아가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주홍글씨의)너새니얼 호손은 아내와 두 딸들이 아내의 친정집에 가 있는 동안 둘째 아들 줄리언과 단 둘이 지내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와의 생활에 대한 일기를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손이 당시 기록한 일기를 책으로 출간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폴 오스터는 아이의 실체를 포착하고 살아있는 순간을 담기에 글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단언한다.
풍경의 선명한 인상과 느낌을 포착하는 그 앞에 앉아서 글을 읽거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풍경에 시선이 끌리면 자연을 불시에 포착하여, 자연이 모습을 바꿀 시간을 갖기 전의 광경을 보게 된다. 그 효과는 한순간만 지속되며 우리가 의식하자마자 사라져 버리지만, 그 순간에는 실재한다. (중략) 사람도 풍경과 마찬가지이며 특히 어린 시절에 그렇다. 아이들은 늘 변하고 움직이며 오직 <불시에>만, 의식적으로 찾고 있지 않을 때에만 그들의 실체를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이 호손의 작은 노트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다섯 살 아들과 함께 보내는 고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호손은 아이의 실체를 포착하고 글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만큼 자주 아이에게 불시에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한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자녀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데, 사진을 찍거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니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글이 더 나은데, 글은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호손은 특유의 소박하고 무덤덤한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부모가 꿈꾸는 일을 해냈다. 그의 아이를 영원히 살아남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기와 함께 하는 이 생활이 꼭 글쓰기에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고충뿐인 육아일기가 된다 하더라도 남은 동안 부디 마감을 어기지 않고 충실히 글을 쓰고 싣는 것을 꼭 가능하게 만드리라, 의지를 다지면서, 마감을 한시간 반 남겨두고 이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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