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남이 연애하는 거 좋아하네


  생각해보면 과몰입 오타쿠의 심장을 가지게 된 건 어렸을 적 읽은 순정만화에서부터였다. 하지만 순정만화의 인기가 시들해진 지 오래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로맨스, 멜로, 연애 따위를 다룬 좋은 작품들도 하나둘씩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다 보니 내가 순정만화를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이번에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친구로부터 ‘주인공들이 학원에서 만나’라는 애먼 설명만 듣고도 단번에 제목을 맞힐 정도로(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만화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와의 거리 1km였나, 그런 제목이었던 것 같다.)나는 원래 순정만화를 엄청 좋아했다는 사실을.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말이다!

  ‘최애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는 설정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 그 외의 이야기는 그다지 새롭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영문을 모르는 남주가 자기를 구하겠다고 온갖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여주에게 황당함을 느끼다가 그 얼렁뚱땅한 그렇지만 또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에 서서히 스며들게 되는 그런 뻔한 이야기겠지, 짐작했다. 여기서 뻔하다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알면서도 찾게 되는 익숙한 맛, 우리가 품고 있는 기대를 기분 좋게 충족해 주는 그 필승의 조합을 뜻한다. 그래서 삐걱대고 투닥거리던 서로가 겹겹이 쌓인 오해를 풀고 어느덧 사랑에 빠진다는, 그런 흔한 로맨스코미디물의 공식을 따랐다 해도 아마 나는 이 드라마를 즐겨 봤을 것이다. 아뿔싸, 그런데! 이 드라마는 작가가 심어놓은 중요한 반전으로 흔한 로코물에 쌍방구원이라는 키워드가 더해지며 깊이 있는 사랑이야기로 거듭난다. 

  처음엔 그저 팬이 최애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갔다가 사랑에 빠지는 단순한 타임슬립 로코물인줄 알았던 <선재 업고 튀어>는 알고보니 사실은 ‘(연예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과거에서부터 최애가 나를 먼저 좋아하고 있었다’는 반전을 통해 뻔한 듯한 이야기에 순애보적인 서사를 부여하고 동시에 연예인과 팬 사이의 연애 감정이라는 불편한 요소를 매끄럽게 해소한다. 소위 ‘유사연애’라고 오인될 수도 있는 불편한 요소를 영리하게 피해나가는 현명한 장치를 심어놓은 것이다. 최애가 원래의 나를 이미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박하고 위험한 순간에 나를 구했고, 그런 최애의 감정을 알게 된 주인공이 팬심 대신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문제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최애가 좋아한 것이 원래의 나인지 과거로 돌아간 현재의 나인지 미심쩍어하며 구분할 필요도 없다(타임슬립해서 과거로 돌아가기 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최애가 나를 먼저 좋아하고 있었다’는 그 반전 이후부터 보는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고 둘이 사랑에 빠지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앞서 언급한 뻔하고도 익숙한 로코물의 맛을 아주 맛있게 내어 주기도 한다. 보는 사람이 응당 기대하며 보고 싶어하는 것을 아주, 제대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전 호 뉴스레터 ‘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과 일맥상통하듯이, 라고 하면 혹시 너무 과분한 인용일까 싶지만 아무튼,,) 고등학생 때의 뚝딱거리고 서툰 감정과 대학생 때의 풋풋하고 가슴 설레는 연애, 34살의 으른격정멜로(?)까지 로코물에서 시청자가 보기 기대하는 모든 것을 최대한 뽑아내 주는 느낌이다. 혹시나 실제로 그런 설렘과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며 초를 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안다. 이게 모두 미화된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하지만 현실적인 무드의 사랑이야기가 보고 싶다면 허진호 감독 영화나 보면 될 일이고(헛소리), 예쁘고 잘생기고 피지컬 좋은 두 주인공이 서로 깨볶고 연애하다 절절하게 사랑하며 극적인 순간에 감정이 극대화되어 뽀뽀하고(뽀뽀갈겨!) 키스하고(키스갈겨!!) 하는 것이 보통의 로코물에서 기대하는 바라고 치면, 그 기대를 기대 이상으로 보답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또 다른 미덕인 것이다. 이제까지 나온 모든 고백신과 키스신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설레었고 좋았다. 때때로 과장된 코미디는 유치하게 느껴지고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주변 인물들은 평이하고 납작하여 도구적으로만 활용되며 편집점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엉성함도 있다. 하지만 하나가 특출나게 뛰어나면 나머지는 다 봐줄 수 있는 법. 그리하여 로코물에서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점잔 빼거나 위엄 부리지 않고 정확히 보여 주는 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느끼는 즐거움’과 ‘놓쳐버린 소중한 순간’이 주는 울림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선재 업고 튀어>에 대한 리뷰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 최애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 솔은 ‘팬심’을 동력으로 한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신의 사랑(비록 이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을 스스럼 없이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지만 선재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객체’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 벅찬 사랑이라는 감정과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었노라고. 그래서 이 드라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조력하는 즐거움을 선재에게 돌려줌으로써 메시지가 완성되는 것이라고.(‘선재 업고 튀어’ 우리가 사랑한 모든 아이돌에게) 또한 과거로 돌아간 솔은 하늘의 별처럼 절대 닿지 못할 것만 같던 최애 선재가 알고보니 바로 앞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동안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흘려 보냈을지를 생각한다. 비록 흘러가 버린 소중한 순간들을 위해 타임슬립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일순간이라도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이렇게 건강한 메시지를 주는 로코라니, 정말 업고 튈 만하지 않은가!


  여담1.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떠오른 의외의 노래는 f(x)의 1,2,3이었다. 아무래도 달린다는 이미지 때문인가. SM TOWN의 캐럴송으로 실려 많이들 모르는 것 같지만 진짜 명곡이다. 요새 제일 많이 듣고 있다. f(x)의 색보다는 페퍼톤스의 색이 더 묻어나기는 하지만..




  여담2. 나도 처음엔 선재를 좋아했다. 선재는 사실 좋아하라고 만든, 온갖 치트키를 다 때려박은 설정 과다 인물이니까.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에 선수출신임을 증명하듯 문짝만한 다부진 피지컬에 솔이를 향한 순애보적 사랑까지. 게다가 노래도 불러, 아이돌미도 있어, 하여튼 이 설정 과다 인물인 선재, 그리고 선재를 연기한 변우석에게 빠저들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 속절없이 빠져든 건 솔 역할의 김혜윤! 여기엔 사실 사심도 조금 섞여있는데 딸의 이름이 혜윤이기 때문이다ㅎㅎ(그래서 전에 김혜윤이 청룡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탔을 때 괜히 좋았다;;) 그렇지만 비단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배우 김혜윤은 매력이 넘친다. 일단 연기를 너무 잘하는 데다 알고리즘이 이끄는 과거 영상마다 열심히 산 게 눈에 보인다. 소위 갓생을 살아와서 숨기거나 부끄럽거나 혹은 보는 사람이 대리수치를 느낄 법한 과거도 없어 보인다. 게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김혜윤이 나온 뮤직비디오와 예능 드라마를 찾아 보다가 <어쩌다 발견한 하루> 메이킹 영상을 봤는데 이거 하루에 최소 세 번씩은 보는 것 같다. 김혜윤 너무 귀여워서 나 울어ㅠㅠㅠㅠ 징쨔 나 혜윤 업고 튈래.
https://youtu.be/JbDKdgdGKh0?si=GMRV7mgPSxSEgez_



  여담3. <선재 업고 튀어>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예전에 읽은 순정만화와 로맨스 웹툰이 여럿 떠올랐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좋아하면 울리는>! 오랜만에 <좋아하면 울리는>이 보고 싶어 찾아 봤더니 혜영과 이어지는 결말이 선오로 바뀌어 완전판으로 다시 나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몹시 마음에 든다. 혜영이도 매력적이고 멋있는 데다 조조와 혜영 사이의 서사와 로맨스 역시 아름답게 그려져서 혜영이와 이루어지는 결말이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좋아하면 울리는>의 남주는 누가 뭐래도 선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조와 혜영의 사랑은 은은하고 포근한 것이었다면 조조와 선오의 사랑은 서툴고 미완이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고 아프고 끌리는 것이어서 계속 선오를 놓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선오와 이루어져야 그 색이 더 유지가 된다고 믿었다. 만약 세월의 흐름에 따른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와 다양한 사랑의 모습, 사랑이 이루어지는 타이밍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하는 작품이었다면 혜영과 이루어지는 게 작품 색에 맞았겠지만 <좋아하면 울리는>은 사랑 그 자체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이 뭔데, 라고 묻는다면 내가 대답하기는 어렵고 그냥 <좋아하면 울리는>을 한번 보시라, 라고 둘러대겠다. 아래는 <좋아하면 울리는> 완전판을 다시 내게 된 천계영 작가의 후기인데 좋은 방향으로 자극이 되었어서 공유한다. 나름 업계에서는 거장인 만화가가 예전에 냈던 작품의 결말을 바꾸면서 ‘이야기를 쓰는 법을 몰랐다’고 고백하기까지는 심오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완결이 난 작품에 굳이 손을 댔어야 하나, 라는 측면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걸 감수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도를 전달하려는 점을 높이 산다. 나는 늘 욕먹을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솔직하게 돌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서바이벌에서 욕망캐를 좋아하는 이유;;)
<좋아하면 울리는> 완전판 후기

  여담4. 그래서 요즈음의 순정만화는 대체 어느 정도의 위상(?)인지, 어떤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게 순정만화는 이제 야자와 아이의 <나나>정도에서 그쳐 있다.(<나나>는 절대 연재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거 같아 슬프다ㅠ 하지만 <유리가면>도 다시 연재를 재개했으니 아주 작게나마 기대를 해본다ㅠㅠ) 그리고 야자와 아이 만큼 유명하거나 순정만화 계에 족적을 남긴 만화가는 아니지만 시이나 아유미라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을 참 좋아했었다. 불필요하게 선정적이거나 불편한 부분 없이 귀엽고 설레고 사랑스러운 만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 또 마츠모토 토모의 <키스>라는 순정만화를 진짜 너무 좋아했었는데 거기에 나온 팝송 패티 오스틴의 ‘Say You Love Me’를 오랜만에 들으니 진짜 귀 호강하는 느낌 들고 좋았다. 여하튼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만화를 그린 만화가들이 요즘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다가 괜시리 아련한 마음이 든다. 

  여담5. ‘행복의 비결은 불편한 걸 잘 해내는 데에 있다’던 김영철의 말이 우울감에 젖어 있던 나를 끌어내 주었다. 우울하면 청소부터 해라, 운동부터 해라, 샤워부터 해라 등등 비슷한 조언들이 많지만 이상하게 김영철의 저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불편한 걸 잘 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동안은 선재를 업고 튀든 말든 운전면허에 집중해야 한다. 부디 이 다음 뉴스레터는 운전면허 합격 후기가 되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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