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비추천 감상을 공유하며,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추리소설들 추천(?)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기억,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록은 대부분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한 경험일 것이다. 나 역시 각자의 바쁜 일상 속에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 나의 기록을 봐 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을
이식해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 애써 남들에게 공유받지 않아도 현대인들의 삶과 일상은 이미 ‘비추’와 혐오와 조롱으로 드글거린다.
우리의 소중한 지면을 ‘굳이’ 내 싫음의 기록을
늘어놓으며 또 하나의 비추 판을 벌릴 필요가 꼭 있나? 라는 물음에는 송구스럽다. 그러나 돈 안 들고 손쉬운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최근 몇 달 동안 공공도서관과 전자도서관 등을 통해 정말 많은
추리소설/장르소설을 읽었고, 나의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타인들의 선택에 조금은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 굳이 나 말고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타인들까지 시간을 내서 읽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장르소설은
세상에 많고 많으며, 대신 그 시간에 볼 만한 더 재미있는 컨텐츠는 더더욱 많다. 그러므로 ‘굳이’ 당신이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추리소설, 장르소설을 내가 먼저 몇 권 미리 알려주기로 했다. 굳이 비추천에 나의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는 이번 호의 변명이다.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이름값만으로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본 현대 작가 중 하나인 히가시노 게이고이기에, 그의 범작 정도 되는 발표작이라도 정말 웬만하면 한국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튜어디스와 비행기를 무대로 하여 80년대에 쓰여진 작가의
초창기 소설집 <살인 현장은 구름 위>는 그야말로
게이고의 하드한 팬이 아닌 이상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 자신할 정도로 한국에서 처절하게 묻혔다. 80년대가
원작임에도 판권을 오랫동안 사오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전도 트릭도 딱히 없고 솔직히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수준으로 재미없는 책. 아무도 이 책 읽지 마세요!!!
<살인범 대 살인귀> /
아리요시 리카코
가족 없는 아이들을 위해 세워진 보육원이 있는 외딴 섬, 태풍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이 끊기게 되었다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을 무대로 하여 초딩을
포함한 10대들이 중2병 가득한 살인극을 벌인다. 뭔 초중딩 주제에 저렇게 사회에 불만이 많고 쉽게 칼부림을 하나 싶을 정도로 동기도 전개도 설득력이 없고 반전은 허무하다. 차라리 배틀로얄 류의 어두운 세기말 감성이 느껴지도록 소년만화로 만들었다면 좀 재미있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글거린다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로 오글거린다.
<기묘한 러브레터> / 야도노
카호루
추리소설 홍보를 할 때 반전에만 집착하는 한국 출판사들의 마케팅 때문에 마치 엄청난 몰입감을 가진 대작인 양
홍보된 책이다. 작가의 정체도 알려진 바 없고 일본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했다고 했는데 아마 나처럼
과대광고에 낚여서 읽어본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 확신한다. 오래 전 갑작스레 이별을 겪어야 했던 두
남녀가 수십년 뒤 인터넷을 통해 재회하여 메일을 주고받으며 애틋한 옛사랑을 서로 추억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남성 화자의 추악한 비밀이 밝혀진다. 물론 반전을 터뜨리는
흐름이 뜬금없거나 허무하지는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면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복선들을 숨겨두긴 했다.
그러나 일본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소재인 근친상간, 여대생의 성매매, 풍속업소, 소아성애 등이 노골적으로 이야기의 주를 이루어서 굉장히
불쾌한데, 심하게 말하면 그냥 인터넷 게시판이나 아저씨들이 보는 스포츠신문 한 켠에 연재하는 눈요깃거리
정도의 인상이다. 추리소설이 문학적인 가치나 교훈을 추구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근친상간과 풍속업소 등의 소재를 이용하기 위해 추리소설이라는 겉핥기로 빌린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작가가 근친상간과 성매매에 대해 집착하는 기분.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 사쿠라이 미나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분명히 죽였는데 남편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심지어
죽기 전(?)과 180도 다르게 다정해졌다? 일단 한 줄 줄거리로는 강렬하게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설정이다. 그런데
현실이든 소설 속이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 없으니 당연히 남편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기하고 있을 것임은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이 안일한 사람 바꿔치기 트릭이 소설의 주인공인 화자에게도 똑같이 쓰였다는 점에서 진부하고 재미가 없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에서의 사람 바꿔치기 트릭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최근 읽은 소설들에서 이런 반전을 너무 많이 접해서 더 식상한 것도 있고. 문제는 사람을 착각하게 하는 트릭과 반전이 정말 뒤통수를 때리려면 서술트릭을 정교하게 구사해야 하는데,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는 아무리 장르소설임을 감안해도
너무 문장이 평이하고 화자에 대한 복선도 없이 그야말로 얼렁뚱땅 전개된다. 정말 재미없고 별 거 없는
반전이니 제발 내 말을 믿기를.
<한낮의 방문객> / 마에카와
유타카
어느 저널리스트가 아파트에서 아사한 어린 모녀의 사건에 관심을 갖고 논픽션 기사를 쓰고자 한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옆집에서 일어난 방문판매 사건에 휘말린다. 그런데
그 방문판매 사기범들의 배후에는 과거에 강력범죄로 형을 받은 바 있는 소년범이 얽혀 있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사회문제들을 우겨넣으려고 하다 보니 결국엔 이도 저도 아니고 뭐 하나 어느 쪽으로도 감명깊지도 않은 소설이 되어 버렸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통의 단절을 다루던지, 현대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각종 범죄나 사기를 조명하던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죗값도 치르지
않고 반성과 갱생도 하지 않는 소년범들의 문제를 다루던지, 아니면 잡탕 소재라도 인물들 간의 관계가
밝혀지며 주인공이 추적해가는 과정을 몰입감 있게 쓰던지…정말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후반부에 가면 반전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데, 든든한 아군이자
너무 모든 면이 완벽하게 그려져서 오히려 대놓고 의심스러운 주인공의 친구가 맨 앞에서 언급한 모녀 사망 사건의 범인이다. 그리고 아무리 작가가 51년생의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라도 그렇지, 가족을 두고 젊은 여대생 제자와 바람난 자기 친구를 불륜녀와 가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가엾은 사람 취급하는 등
진부한 불륜 소재와 더불어 쉰내나는 결말로 끝난다. 사회파 추리소설도 아니고 본격 추리소설도 아니고, 너무 많은 재료들 때문에 결국은 아무 맛도 나지 않게 되버렸다. 나를
믿어달라고 호소하고 싶다. 진짜로 굳이 안 읽어봐도 되는 추리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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