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르노 <한 여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그에 대해 적은 글, <한 여자>의 시작은 이렇다. 요양원으로부터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에 도착해 장례수속을 밟는 의례적이고도 사소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일상적인 것이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십자가에 고정하는 못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간호사, 관의 가격은 모두 세금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직원, 어머니의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갈 때까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 바깥에서 대기하는 어머니와 같은방을 쓰는 부인, 소지품 목록에 서명을 하고 챙겨 갈 어머니의 소지품을 챙기는 자신까지. 처음부터 흡입력이 상당하다. 마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정밀화를 그리듯 삶의 아주 구태의연한 부분까지 적어 내려가서 그 시시함과 허무함을 유독 도드라져 보이게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는 통속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매체에서 다루어 왔고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역시 어쩌면 익숙할지도 모를 이야기이다. 전형적인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라 본인보다는 더 나은 삶을 물려주려고 열심히 딸을 교육시키는 어머니와 그 기대에 부응토록 엘리트로 자라 중산층에 편입되어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혹은 거리감을 느끼는) 딸에 대한 이야기라면 빤한 클리셰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빤한 클리세 같은 이야기가 자꾸만 마음 어딘가를 불편하게 자극한다. 아니 에르노가 적는 어머니, 한 여자의 일생을 읽으며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노르망디의 촌구석과 들어보지도 못한 이브토라는 낡은 소도시를, 그곳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관공서를 상대하며 더는 촌티내지 않겠다는 바람으로 세련되고 우아한 말씨를 구사하려는 한 여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의 바람대로 더 나은 삶을, 더 높은 계층을 향해 나아가지만 친구들의 어머니와는 다른 그 여자를 때론 부끄럽게 여기며 원망하는 딸을 보며 나와 우리 엄마, 우리 엄마와 우리 엄마의 엄마(할머니)를 생각했다. 모든 딸들은 엄마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적어도 한번쯤은 다짐하는 법이므로.
이처럼 어머니를 ‘한 여자’로 치환시켜 한 여자의 일생을 서술해 나간 글은 세대와 국경을 지나 보편성을 획득한다.(노르망디의 촌구석에서 식료품을 운영하는 한 여자는 통영 촌구석에서 뱃일을 거드는 한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그 어떤 낭만이나 꾸밈이 없어 냉정하리 만큼 분석적이기도 한 것이 이 글의 특징인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보르도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슷한 학력 수준을 지닌, 그러나 가족이 속한 사회적 계급은 다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는 딸이 그 엘리트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경멸하지는 않을까 내심 두려워 하는 모습이라거나 딸네 집에 같이 살면서 스스로를 가정부로 여기는 듯 일부러 비굴하게 구는 모습들 그리고 그 모습을 어머니라는 여자가 취하는 ‘반항방식’으로 규정짓는 데에서 여타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와 차별점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많이 배우고 잘난 딸에 대해 부러 낮춰 행동하는 것을 ‘반항방식’이라고 요약하는 통찰에 감탄이 났다. 그러니까 앞서 말했듯 딸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 그리고 엄마의 바람대로 자랐으나 이제는 자신보다 약하고 무지해진 엄마에게 괴리감을 느끼는 딸에 대한 이야기는 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남겨진 엄마의 속내를 이토록 분석적으로 통찰력 있게 써 낸 글이 과연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에르노는 이 글을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라고 밝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흔한 담론이 떠오르기도 하나 긴 세월 본인의 삶과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까지도 작품으로 남겼던, 그리하여 그 솔직하고 꾸준한 기록을 통해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쥔 작가의 이야기라면 더 깊이가 느껴질 것이다. 지난 호에 썼듯, 폴오스터는 너새니얼 호손이 그의 아들과 함께 보낸 3주간을 매일 기록한 글을 두고 글을 통해 아이의 실체를 포착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아이를 영원히 ‘살아남게’ 했다고 말했다. 비록 온도는 다르지만 아니 에르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기록하고 글로 남기면서 한 여자를 평생 살아 있게 만들었다.
인상 깊은 구절들이 많았는데 아기가 밤에 잘 때 틈틈이 읽었던 관계로(또또 육아핑계) 사진을 많이 못 찍어 놓았다. 그래도 몇 장 찍어 놓은 데에서 마음을 울렸던 구절을 몇 개 공유해 본다.
“이것은 쉽지 않은 시도이다. 내게 어머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어머니는 닌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중략) 또 내가 붙들고 싶은 여자는 나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여자, 노르망디의 소도시 촌구석에서 태어나 파리 외곽지역의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병 전문 의료 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실제의 그 여자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적 관습들, 종교적 제례, 돈을 경멸하기 시작헸다. 랭보와 프레베르의 시들을 베껴 적었고, 공책 표지에 제임스 딘의 사진을 붙였으며, 브라생스의 좋지 않은 평판을 들었고 권태를 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 부모가 부르주아들이기라도 한 양 낭만적인 방식으로 청소년기의 반항을 겪고 있었다.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가정부로 여기는 것처럼 굴면서 르몽드 신문을 읽고 바흐를 듣는 딸과 사위의 실질적, 문화적 지배를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경제적, 가상적 지배로 바꾸어 버렸다. 반항하는 나름의 방식”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읽고 혹시 작가와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면 이 기사 두 개가 그녀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911082053005#c2b
https://n.news.naver.com/article/310/0000100717?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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