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기 시각 위주 감각자의 전시회 기록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시각이었다.
모두가 기피하고 욕하는 와중에도 제법 즐겁게 임할 수 있어서 '어라 이거 적성인가' 싶었던 업무가 PPT 구성 및 작성이었고, 외국어에서도 늘 리딩이 (그나마) 제일 나은 수준이었다. 말하기나 쓰기야 다들 어려워하는 거라지만, 난 정말 듣기부터 고역이었다. 아이돌 덕질도 늘 외모부터 시작했고, 책을 보는 취미든, 유적지나 보물 같은 걸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든 선택의 1순위는 보는 것 위주로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보러가는 것도 매우 좋아하는데, 하필 최근에 굉장히 핫해져서 이게 나의 고유의 취향이 맞는지, 줏대없고 귀얇은 인간의 트렌드 따라잡기에 불과한지 확신은 없지만, 어쩌다보니 2분기 주요 전시들을 다녀오게 되어 자랑 겸 잊지 않을 겸 기록해본다.



230422 / 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 마이아트뮤지엄

마이아트뮤지엄은 나에게 D뮤지엄의 모범생버전이랄까. 상업적인 포인트를 잘 잡아 기획하는 점, 접근성 좋게 각종 이벤트와 할인행사들과 함께하는 점은 유사하게 느껴지는 반면, D뮤지엄이 젊은 감각으로 파격적이거나 낯설거나 새로운 것들을 시도한다면 상대적으로 마이아트뮤지엄은 고전적인 타이틀을 가져간다고 느껴진다. 이번 전시 역시 전면에 내세운 아티스트가 그 유명한 '피카소'일 정도로 눈에 띄는 기획. 다만, 이름값에 대한 기대만큼 화려한 내용은 아닐 수 있다.

독일과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며 루드비히 미술관 컬렉션을 소개하는 것으로, 20세기 주요 미술사조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1장은 독일의 표현주의와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2장은 피카소와 동시대 거장들, 3장은 초현실주의에서 추상 표현주의, 4장은 팝아트, 5장은 미니멀리즘, 그리고 6장은 독일의 현대미술 동향을 다룬다.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구체성에서 추상성으로 변화하는 것이 잘 느껴진다. 또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설치미술 같은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 칸딘스키나 샤갈, 모딜리아니, 잭슨 폴록처럼 한 번쯤 이름도 들어보고 스타일도 알 것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실제로 만나보는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 : 기대나 귄터 워커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의 묵직한 충격감도 좋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면 추천.

정보는 여기 ▶ 마이아트뮤지엄, MY ART MUSEUM


230513 /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 아트 @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전시를 예매하던 시점까지만 해도 데이비드 호크니와 에드워드 호퍼가 헷갈렸다. 동성애자이고 수영장을 그렸던 게 호퍼였던가, 미국 현대인들의 고독함을 그렸던 게 호크니였던가. (반대입니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 데이비드 호크니 개인전이 제법 크게 개최되었던 것이 서울시립미술관이었네. 그때 처음으로 호크니를 알게 되었고 '풍덩'이란 작품이 인상에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보러 간 건데.. 사실 호크니의 비중은 기대보단 적고 영국의 1960년대 시대상이 좀 더 강조되었던 것 같다.

당시의 염세적이기도 파격적이기도 한 사회적 분위기와 그에 맞물리는 예술적 시도들은 분명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와닿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좋아하는데 팝아트 쪽은 딱히 흥미가 없다. 그럼에도 가장 메인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퍼레이드'나 '가수와 정원, 어린이와 마술' 같은 작품들은 알록달록한 색감에 세련된 구도 같은 것들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눈길을 끌었다.

DDP에서 전시를 본 건,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이후로 두 번째인데, 이번에도 그저 그랬다. 일단 웨이팅 시스템이 짜증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 관람 환경이 쾌적하지만도 않다. 동선 구성도 헷갈린다. 케찹고백하자면 이번에 소개하는 전시들 중 가장 별로. 물론 나는 미알못이고, 추가로 다행이랄지(?) 7월 2일자로 전시가 종료되어 추천도 비추천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정보는 여기 ▶ 지난 전시 - 데이비드 호크니


230527 /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최근 내가 갔던 모든 전시 중에 사전 공부를 제일 많이 하고 간 전시. 연초부터 워낙 기대를 모으던 전시였기에, 얼리버드 예매부터 그야말로 피케팅이었다. 몇 번의 눈물나는 시도끝에 겨우 성공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날 다른 일정이 생겨서 많이 늦어졌다. 게다가 비가 엄청 쏟아지던 날이라 잔뜩 젖은 채로 도착. 예정 시간보다 30분이 지나면 입장을 안 시켜준다고 그래서 거의 울먹거리며 입장... 안 되나요? 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무심한듯 시크하게 가능하다고 해줬다. 역시 서울시립미술관 최고의 미술관!!

근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서울시립미술관은 내 최애 장소 중 하나다. 전에 명동에서 근무할 때부터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종종 찾아가곤 했었다. 특히 점심 때 약속이 있다고 뻥치고 빠져나와 느긋하게 전시를 구경하고 대충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사무실로 돌아갈 때 묘하게 벅차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여튼 그런 좋은 마음을 품고 갔는데, 과연 작품들도 많고,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던 것에 비하면 꽤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만, 나와 비슷한 미술 지식 수준을 가진 사람이 '에드워드 호퍼'하면 기대할 만한 주요 작품들은 별로 없다는 점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촬영은 일부 관에서만 제한된 것도 아쉬운 점. 덕분에 열심히 폰으로 메모하며 관람했는데, 자화상을 보며 '넘나 전형적인 미국 아저씨인데 관상에 미술이 1도 없어보임' 이라고 쓴 게... 신경쓰이네...

전시를 보면서 아내 조세핀의 역할이 정말 생각보다 그 이상으로 어마어마했다는 걸 느꼈는데, 그 와중에 이 미국아저씨는 아내 고마운 줄 모르고 나댔다는 뒷이야기를 보았다. 이런 이야기는 전세계 모든시대를 막론하고 너무 자주 접해서 새롭지도 않은데, 그래도 실망스럽긴 하다. (disappointed, but not surprised) 현대인의 고독, 사회적 소외, 전반의 불안 어쩌고 거창하게 말해봤자, '수신제가'조차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실 이건 친구들과도 몇 번 이야기했던 주제이긴 하지만, 예술가의 인생과 작품을 별개로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건 여전히 나에게 답없는 질문이다.

대표 이미지로도 활용된 '철길의 석양'같은 작품을 보면 이 작가가 천착했던 빛의 표현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데, 바라보고 있자면 어쩐지 코끝이 찡해질 정도이다. 한편으론, '푸른 저녁'을 보고 있자면 '나이트호크'와 함께 일종의 "나폴리탄 괴담 - 알고 보면 오싹한 그림"같은 시니컬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히치콕의 작품이나 느와르 장르에 몰두한 적 있다는 소개답게 '밤의 그림자'같은 작품들은 단 한 장면의 2차원 그림임에도 긴박감과 서스펜스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작품으로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느껴지게 하는 것이 어찌 재능이 아니겠는가. 말하다보니 어쩐지 씁쓸한 뒷맛이 남네요.

정보는 여기 ▶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


230528 / 다시 보다 : 한국근현대미술전 @ 소마미술관

큰 기대 없이 갔는데, 의외로 정말 좋았다. 미술 분야에선 약간 사대주의에 빠져서 한국 화가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런 나도 몇 번 들어보고 관심있는 화가들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정도인데, 바로 이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전시였으니 당연히 감동과 감탄의 연발.

구성부터 굉장히 직관적이면서 깔끔했다. 첫 번째인 우리 땅, 민족의 노래에서는 향토적 정취가 느껴지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고, 두 번째 추상, 세계화의 도전과 성취에서는 세계적 흐름과 맞닿은 시점에서 새로운 표현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세 번째에서는 여성 화가들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했는데, 잘 몰랐던 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네 번째는 디아스포라, 민족사의 여백, 마지막으로는 조각, 시대를 빚고 깎고 라는 제목으로 입체 조형들을 주로 다뤘다. 이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종횡을 모두 가로질러 살펴볼 수 있어 그야말로 알찬 전시였다.

내가 간 날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사람이 생각보다 없어서 정말 여유있게 꼼꼼히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장욱진의 '소 있는 마을'나 이중섭의 '가족과 비둘기'같은 작품은 어쩐지 귀여우면서 따뜻하게 느껴졌고, 천경자의 '꽃과 나비'나 이성자의 '용맹한 4인의 기수'같은 작품은 과연 섬세하고 화려해 내 방에 걸어두고 오래 두고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산'을 보며 김환기라는 작가가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유를 너무나 잘 체감할 수 있었다.

미술... 관심이 쪼끔 생기긴 했는데 잘은 몰라서 전시 관람에 진입 장벽을 느낀다면 이 전시를 추천한다. 그야말로 24부작 드라마 30분 요약.youtube 또는 입문자를 위한 핵심요약 101 같은 전시.

정보는 여기 ▶ https://soma.kspo.or.kr/dspy/display/207


230606 /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 국립중앙박물관

이건... 큰 기대 하고 갔는데, 기대만큼 좋았다. 요 몇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은 정말 국립답게 '블록버스터' 전시를 선보이고 있는데, 감히 제일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 수가 총 52점으로 많지 않은 것이 옥의 티처럼 아쉬운 부분. 그러나 오히려 또 집중해서 하나 하나 꼼꼼히 볼 수 있어서 더 기억에 남는 것도 같다. 경험상 작품 수가 너무 많으면 초반에는 힘주어 살펴보다가도 후반에는 기운 빠져서 대충 넘기게 되기 때문에. 작가당 딱 한 작품씩 선보인 것도 인상적인 포인트였다. 그야말로 교과서 한 권을 쭉 훑는 것 같았다.

나의 최애 화가인 반 고흐의 작품을 포함해 보티첼리,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고야같은 그야말로 거장 중의 거장들의 작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르누아르, 마네, 모네, 고갱의 작품까지 서양미술사를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전시를 보다보면 어쩐지 유럽 여행 온 기분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덤.

전시 공간의 구성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시대나 주제별로 굉장히 짜임새있게 연결되어 몰입감을 더하고 공간에서 공간을 이동하는 순간조차도 일종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게끔 디테일하게 신경쓴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정보는 여기 ▶ https://www.museum.go.kr/site/main/exhiSpecialTheme/view/current?exhiSpThemId=1123991&listType=list


230624 /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전 <뒤피:행복의 멜로디> @ ALT.1 더현대서울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니 이것은 내가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가 그 뒤에 붙은 이름, 라울 뒤피를 보고 잘 모르는 사람이네 스킵, 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특가가 떠버린 건에 대하여... 소비지향 시대에 살고 있는 귀얇은 나로서는 할인한다 하니 또 솔깃해서 호다닥 예매.

호퍼전 같은 경우는 대부분 작품에 대해 촬영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사전 공부를 더 빡세게 했는데, 이번 전시는 작품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촬영이 불가하다고 했음에도 큰 공부를 하진 않았다. 그냥 아름다운 작품 보며 눈요기나 하고 와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백프로 만족하고 왔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면서 사랑스러운 색감과 화풍을 만날 수 있다.

더현대서울의 ALT.1은 처음 방문했는데, 백화점 한구석(?)에 있는 공간 치고는 꽤 넓어서 놀랐다. 사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온도조절일지도. 에어컨을 어찌나 빵빵하게 틀던지, 모든 관람객을 최대한 춥게 만들어서 내쫓으려는 시도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에어컨을 갖추고 있음을 자랑하는 퍼포먼스인가 싶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촬영이 가능했던 전기의 요정은 약간 유치한 느낌인가 했는데, 일단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쭉 이어지는 규모에 놀라게 되고, 마치 학습만화 시리즈처럼 그 면면에 과학자나 기술자, 일종의 관념이나 개념같은 것들까지 촘촘하게 그려넣음으로써 완성한 작가의 책임감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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