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시간을 채워줄 한국 장르소설을 찾는다면
누워서 배 벅벅 긁으며 장르소설을 보거나 각종 커뮤니티들의 글의 바다를 끊임없이 떠다니거나 (집중력이 극히 낮아져서 긴 유튜브 영상이나 넷플 같은 건 집에서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간혹 재테크 정보나 기웃거리는 것이 집에서의 내 모습이다. 사실 나라는 사람 한 명만 먹고 살자면 지금 본가의 내 방에 화장실, 세탁실 정도만 있어도 일상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누워서 지내기를 좋아한다. 나도 알록달록하게 일상 공유라도 하고 싶지만 회사 외의 내 일상에 이런 거 말고는 거의 있질 않으니 송구스럽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다. 개인적인 기록 겸 또 장르소설 추천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나... 다만 이번에는 오랜만에 한국 장르소설, 특히 도진기 송시우 정해연 등 이미 유명한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소설들 위주로 간단히(?) 리뷰를 작성해 본다.
이소민 <영원한 밤>
기대하지 않은 책이 눈에 띄어서 전혀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시간 때우기로 읽었는데 예상 외로 재미있을 때의 쾌감이라니! 예고의 발레 전공을 배경으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들 간의 갈등 그리고 복수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교차증언을 통해 점점 완성되어 가는 사건의 진상은 그야말로 통쾌하기 짝이 없다. 어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줬기에 아이들은 그저 그 가르침대로 어른들에게 복수했을 뿐이다. 장편소설 치고 다소 엉성한 짜임새가 느껴지고 작위적인 설정(교사의 친오빠라고는 해도 엄연히 외부인인 기자가 여학생들만 있는 발레과 학생들을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한다거나)이 거슬리는 부분도 있으며 반전이 세상에 없던 엄청난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사실 이런 식의 반전을 가진 추리소설은 모두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살인>에 얼마간 빚을 지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도 작가가 일부러 여자, 여고생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비웃을 의도로 그런 결말을 쓴 것은 아닐 것이라 해도 어른들이 생각하는 10대 여고생과 그 여고생 무리들에 대한 선입견이 통렬히 깨지는 결말이 충분히 재미있었다.
김진영 <마당이 있는 집>
작가 후기에 있는 묘사대로 여성들 사이의 ‘뒤틀린 연대’,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스릴러 소설. 한참 연상의 의사 남편을 만나 신도시의 마당이 있는 집에서 부유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와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지만 앞으로 생계가 녹록치 않은 파트타임 주부 상은 전혀 다른 색채의 삶을 사는 두 여자가 각자의 남편에 대한 의심에 휘말리고, 그 이후 두 여자의 연대는 장밋빛으로 꺄르륵 가득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헤어지게 된다. 결국은 각자의 삶을 진정으로 괴롭히는 숙주는 다른 여자가 아니라 내 옆의 남편임을 깨닫고 여자들 스스로가 그 숙주를 제거한다.
정해연 <홍학의 자리>
아마 최근 한국 장르소설 쪽 가장 베스트셀러일 것이다. 영등포구 스마트도서관(전자도서관)은 구민들 사이에서 별로 이용을 하지 않는지, 서울시나 경기도 전자도서관에서는 예약이 많아서 금방 포기했는데 영등포구 전자도서관에서 검색해 보자 곧바로 빌릴 수 있었다. 거의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 수준으로 다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부분 대중적이고 흥미 위주로 잘 읽히는 소설들이 많다. <홍학의 자리> 역시 자신의 제자와 불륜을 하던 남교사 그리고 그 제자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라는 통속적인 장르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커뮤니티 등에서 입소문을 타고 빵 터진 것은 제자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그 자체보다는 쭉 독자를 오독시키다가 마지막에 빵 터지는 한 줄의 반전이다. 감히 '금방 알아챘다'고 말 할 정도는 아니지만 소설 중간중간에 다소 쎄한 포인트들이 마지막에 가서 설명이 된다. 솔직히 추리 분야를 좀 헤비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커뮤니티들의 바이럴만큼 엄청난 역대급 반전까지는 아닐 수 있으나, 한국에서 여성 작가의 장르소설이 이만큼 흥행몰이를 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윤석 <셜록의 아류>
근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지금의 사회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단편집이다. 예를 들어 데이트조차도
‘리뷰’받고 별점화되는 어플, 장애와 불행마저도 유튜브의 조횟수팔이와 서사팔이를 위해 창조되고 소비하는 대중 등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잠식한 우리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비꼰다. 또한 인류의 근미래라거나 SF적인 상상력을 통해 요즘 사회를 뒤틀어서 풍자(여장남자 유튜버 풍자 아님)하는 단편들은 SF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다만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 전혀 없이 이름 가리고 읽어봐도 아 작가가 한국남성(줄여 쓰면 큰일남)이겠구나 싶은 설정이 부분부분 느껴진다.
강지영 <개들이 식사할 시간>, <살인자의
쇼핑목록>
호러, 미스터리, 순수문학 등의 장르를 넘나드는 강지영의
단편집이다. 최근 장르소설 쪽에서 이름난 작가들 중에는 강지영 작가가 가장 문학적인 터치로 장르소설을 쓰는
것 같다. 다만 내용이나 필체 등에서 2030 작가들과는 다른 감성이
느껴지는데 역시나 문장도 좋고 쓰는 소설들도 사실 일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 어디쯤에 위치해 있긴 하다. 성공한 장편 <심여사는 킬러>나
<살인자의 쇼핑몰> 같이 한없이 상업적인 장르소설로 강지영 작가를 접하게
되었지만 단편집을 연속 2권 읽으니 실은 일반문학에 가까운 주제의식이나 혹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현실을 뒤틀어
보기 위해 접목시키는 듯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다만 장르소설, 추리소설 쪽을 더 선호하는 독자라면 필체나 소재가 다소 올드하게 느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살인자의 쇼핑목록>의 수록작인
<용서>라는 단편의 따스함도 좋았다.
최혁곤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은퇴 형사 동철수의 영광>
킬링타임용으로 휙휙 넘기면서 보기 괜찮은 연작소설집. 전자는 형사는 아니지만 못나고 찌질한 남자 둘이 탐정질을 하며 먹고 살다가 후반에 가서 전체 줄거리를 관통하는 결말. 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해빠진 남자 형사,경찰들의 버디(buddy)물. 아주 명작이다 정도는 아니지만 유머러스한 필체와 부담 없는 내용으로 킬링타임용으로는 딱이다.
앤솔로지 <내게 남은 사랑을드릴게요>
징르소설보다는 본격적인 SF에 가까운 여성 작가들의 앤솔로지이다. 요즘 안전가옥 등의 레이블에서 정말 다양한 앤솔로지를 출판하고 있는 데다가 그 대부분이 지역구 전자도서관 이북으로 출판되어 있어 SF에 대한 접근성이 많이 낮아졌다. <내게 남은 사랑을 다 드릴게요>는 이미 인기 작가인 김초엽 천선란 등을 을 비롯하여 인류의 신기술과 로봇 등을 소재로 현실을 비꼬아 보거나 혹은 감동을 안기는 다양한 여성 작가들의 단편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장의사를 대신하여 시신을 염하는 로봇과 장레식장의 청소부로 일하는 인간 할머니의 우정을 그린 잔잔한 천선란의 단편 <뼈의 기록>이 가장 울림이 남는다.
서미애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역시 여성 장르소설 작가로써는 한 손은 아니라도 두 손에는 꼽힐 정도로 인지도 있는 서미애 작가의 장편이다. 그래서 많이 기대하고 읽었는데 한결 기대 이하라서 한 줄 넣어봄. 서미애 작가는 솔직히 장편은 만족한 적이 없고 단편에 특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외에도 홍선주 <푸른 수염의 방>, 남유하 <양꼬치의 기쁨>, 황세연 한새마 조동신 등의 작가들이 40이라는 키워드로 쓴 앤솔로지 <드라이버에 40번 찔린 시체에 관하여> 등의 단편집도 당신의 쉬는 날을 꽤나 재미있게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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