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장점과 네일숍

 


  전신주도 한때는 근대의 상징이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역으로 향하는 내리막에는 어지러운 전신주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참 예스러운 풍경이네 생각하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이 어지러운 전신주야말로 근대의 상징이자 도시의 문명을 자랑하는 거리의 떳떳한 오브제였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요즘에는 미관상의 이유로 새롭게 개발되는 대형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에서는 모두 전선을 땅에 묻는다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그것이 도회적 감상을 자아내는 도구였다는 것이 몹시 흥미롭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김광균 「데생」*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늘 흥미로웠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이미 사라진, 사라지고 있는, 그리고 곧 사라질 모든 것들과 그 흔적들이. 문헌학자 김시덕은 <갈등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흔적을 ‘도시화석’이라 일컫는다. 이제껏 한 단어로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뿐 이런 도시화석에 대한 호기심은 문헌학자가 아닌 내게도 있었다. 





  언젠가는 유람선을 탔는데 의자에 ‘내쇼날 푸라스틱’이라고 적혀있었다. 당시에는 대중적인 외래어 표기법을 따서 만든 평범했을 플라스틱 제조회사 이름이지만 이제 와서는 ‘내쇼날’도 ‘푸라스틱’도 귀여울 만큼 복고틱해서 사진을 여럿 찍었던 기억이 난다.(현재는 NPC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런 복고틱한 문자는 주위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식당에 가면 보이는 일회용 ‘케챺’과 오래된 다세대 주택가 동네의 ‘콤퓨타 세탁’이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외래어를 나타낼 때 받침은 ㄱ, ㄴ, ㄹ, ㅁ, ㅂ, ㅅ, ㅇ 단 7개의 자음만 허용하기 때문에 ‘케챺’의 경우 바른 외래어 표기법은 ‘케첩’이 되겠지만, 아마 이러한 외래어 표기법이 자리잡기 전에 ‘케챺’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예로 로켙/로케트, 슈퍼마켙/마케트, 케잌 등이 있고 이 역시 내 눈에는 무척 귀여운 문자로 느껴진다.(사족이지만 만 30개월 아이는 항상 ‘슈퍼마트’에 가자고 한다. 슈퍼마켓도 마트도 아닌 슈퍼마트를. 슈퍼마트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콤퓨타 세탁’은 처음 봤을 때 ‘대체 콤퓨타 세탁이 뭐지’하는 궁금함 때문에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예전에 찾아본 바 ‘콤퓨타 세탁’은 콤퓨타 세탁이라는 최첨단의 세탁법이 있는 게 아니고 과거 수동으로 작동하던 세탁기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작동하는 ‘전자동’ 세탁기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기야 당시에는 그것이, 즉 기계가 전부 세탁을 한다는 자체가 최첨단의 세탁법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반대로 간단한 혹은 옷감이 상하지 않는 세탁을 위한 (최첨단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손빨래 세탁기’가 나오는 판이니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이버 아파트’ 가양동에서 살 때의 아파트에는 입구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 찾아보니 인터넷이 한창 도입될 시기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던 것 같고 심지어 아파트 이름이 ‘oo 사이버 아파트’인 곳도 전국적으로는 꽤 있는 듯하다. 지금에야 집에서 인터넷이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조금도 강조할 거리가 안 되지만 당시에는 통신설비가 완비된 아파트라는 것이 소구효과가 있었기에 저런 문구를 써놓았을 것이다. 이제는 세기말을 떠올리게 하는 ‘사이버’라는 말이 한때는 그 단어 자체로 가장 핫한, 요즘 따라잡아야만 할 그 무엇이었으리라. 그런가 하면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읍시다’, ‘시간을 잘 지키는 어린이가 됩시다’라는 팻말이 있는데 대체 어떤 연유에서 이런 문구를 적었는지는 몰라도 요즘 지어지는 신축 아파트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향수이기에 더 특별해 보인다. 

  나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서 많이 살았다. 성내동, 신길동, 중계동, 공덕동, 가양동, 그리고 최근에 이사한 돈암동까지. 대규모 베드타운 역할을 하는 노원과 강동, 강서 지역을 제외하면 전부 도심지에 인접해 지어진 상업용 고층 빌딩과 다닥다닥 지어진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구축 아파트 단지가 어지럽게 배치된 도시 난개발의 상징과도 같은 동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 동네에선 ‘콤퓨타 세탁’, ‘슈퍼마켙’, ‘사이버 아파트’와 같은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이제 그런 과거의 풍경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돈암동에서는 구축 가옥과 오래된 노포, 소규모 상점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이 역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아련한 감상만을 가지고 개발은 무조건 나쁘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보존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건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문제인 만큼 아는 것도 없이 숟가락을 얹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자꾸만 사라져 가는 것들이 조금은 아쉽다. 




  마지막으로 ‘이버방’이 있다. 답십리역에서 근무지로 가는 길에 있는 폐점한 양장점의 이름이다. 양장점이라니, 기성복 매장이 아닌 양장점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양장점을 밀어낸 기성복 매장 조차 이제는 온라인 쇼핑과 대비되는 과거의 산물로 여겨질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언제까지 영업하다 폐점했을까,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간판과 이름은 퍽 인상적이었다. 불란서 말 같지만 한국어고 또 애교스러운 이름이라 어쩌면 유행의 흐름을 두어 번 건너 지금 다시 유행할 만한 이름이건만 얼마 전 그 길을 지나가니 이젠 남아있던 간판도 떼어지고 네일숍이 들어섰다. 양장점에서 네일숍으로.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많은 것들이 자꾸만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된다. 

  새해 결심으로는 터무니 없이 감상적인 글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 새해 결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이다. 떠오르는 잡념들을 대충이라도 기록하자고 매해 결심하기 때문이다. 잘 쓰지 않아도 되고 논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안한 것과 다름 없으니 그저 아무렇게나 적자고 결심해 본다. 

*김광균: 193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 도회적인 소재를 사용한 시가 많다.

**NPC주식회사: 1960년대 국내 최초로 조롱박의 모양을 따 플라스틱으로 바가지를 제조했다. 가장 유명한 바가지 사진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0554621?s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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