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

그간 딱 세 권의 책을 읽었는데 마침 한 권은 좋았고 또 한 권은 나빴고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이상할 만큼 좋았기에(걍 너무 좋았다는 뜻..) 억지를 써서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으로 제목을 붙여 보았다.


1. 좋은 책: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인터넷을 하다가 책을 추천해 달라는 글이 올라 오면 꼭 클릭해 읽어보고는 한다. 이상한 고집이 있어 누가 추천해 줘도 웬만큼 내키지 않으면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그러다가 개중에 정말 보석 같은 책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책 추천 글은 아무래도 지나칠 수가 없다. 그렇게 알게 된 작가가 바로 백수린 작가, 책 추천 글에 달린 댓글에서 종종 만나곤 했던 작가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게다가 내가 몰랐을 뿐 등단 이후 국내 문학계에서는 소소하게 화제가 된 인기 있는 작가인 듯했다.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은 장편 소설인 <눈부신 안부>, 여러 문학상 수상작을 모은 단편집 <여름의 빌라>였지만 구독 중인 전자책 서비스에 없는 관계로 아쉬운 대로 해당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그의 유일한 책, 에세이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게 되었다.

서론이 길었는데 요지는 꼭 클릭해 읽어 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읽게 되지는 않는 그 흔하디 흔한 책 추전 글에서 아주 운이 좋게도 보석 같은 책과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고작 에세이 한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고백하자면 그 한 권도 다 읽지 못하고 아직 읽는 중이지만..)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건네는 작가의 책이라면 뭐든 믿고 읽어도 되겠다는 신뢰감이 생겼달까. 그냥 그런 따뜻함이 아니라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헤아린 후 신중하게 건네는 말이라 허투루 듣게 되지 않는 따뜻함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가수 김창완이 라디오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에 대한 답장으로 쓴 글 중 유명한 글이 있다. 


바로 이 ‘찌그러진 동그라미’ 답장. 이 책을 읽으며 이 답장이 떠올랐다. 이 답장과 닮았다면 아주 좋은 책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ㅎㅎ). 더불어 글 솜씨를 발휘해 절묘하게 식빵, 마카롱, 팬케이크 등 다양한 빵에 비유해 소개한 작가의 추천 책들을 언젠가는 하나씩 찾아 읽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처럼 나도 이 책을 빵에 비유해 보려고 한다. 어떤 빵에 비유해야 적당할지 한참 생각해 보다가 딱 떠오른 것이 ‘갓 구운 쿠키’. 예전에 출근길이 너무 고되고 힘들 때 스스로를 위로하려고(혹은 어떻게든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어보려고) 곧잘 들르던 작은 카페가 있었다. 거기선 아침마다 쿠키를 구워냈는데 정말이지 그 냄새가 너무너무 달콤했다. 고단한 일상 속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갓 구운 쿠키, 그 갓 구운 쿠키 냄새 하나로 큰 위로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맡는 순간 기분이 좋아질 만큼의 효과는 있는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2. 나쁜 책: 정해연 <더블>

조금이라도 끌리는 제목을 짓겠답시고 영화 제목을 따서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이라고 했지만 한 책을 두고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미안하기도 하거니와 주제 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이 책을 나쁜 책에 꼽았지만 적당히 걸러서 받아 들여 주십사 하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일단 초반부는 정말 재미있다. 만약 끝까지 이 감상이 이어졌다면 아마 제목을 ‘좋은 책, 좋은 책, 그리고 또 좋은 책’ 이런 식으로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요 사건이 시작되면서 주인공의 행동이 설득력을 확 잃어 버리고 마는데, 그 때부터 이 책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나 멈추지 않고 엔진이 다할 때까지 끝끝내 잘못된 길로 달리고 마는 그런 자동차를 떠올리게 한다.

부연 설명을 하기 위해 스포가 될 만한 책의 내용을 잠시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매사 철두철미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형사 도진은 내연녀가 자신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이어나가려고 하자 내연녀를 죽여버린다. 내연녀를 죽인 후 사전에 내연녀와 함께 가기로 계획되어 있던 휴가를 가게 되는데 그 휴가지에서 또 다른 시체를 보게 된다. 처음엔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니 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신고를 해서 살인사건 수사가 일어나고 그러다 내연녀를 살해한 덜미를 잡히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대체 휴가지에서 시신을 발견해서 살인사건 수사를 하는 것과 자신이 내연녀를 살해한 것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겠으나 정말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게다가 도진은 내연녀를 살해 후 시신이 발견되지 못하게 어디 숨긴 것도 아니고 어치피 발견될 것을 감안하여 시신을 내연녀 자택에 두고 그저 발견시간 만을 늦추기 위해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어놨을 뿐이다.) 그 시체를 손괴하고 만다. 이게 대체 납득이 가는가. 켕기는 데가 있어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를 하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시체를 갑자기 손괴한다고? 그렇게 손괴하는 이유가 고작 도진이 사이코패스라서? 여기서 부터 길을 아주 잘못 들었다. 도진은 분명 철두철미하고 냉철하고 똑똑한 형사이다. 그런데 고작 사이코패스라는 이유 하나 붙여두고 온갖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다. 시체를 손괴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 그 후 이어지는 말과 행동들도 너무 허술해 철두철미, 냉철, 똑똑한 도진의 캐릭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어떻게든 진행시켜 나가야 하기에 캐릭터를 이야기에 욱여넣은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다. 도진의 라이벌 장주호 형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도진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세운 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으며 아내를 걱정하는 듯한 부분을 넣어 일종의 서술트릭을 시도했지만 그 속임수 또한 너무 빈약해 반전이 드러났을 때 헛웃음이 난다. 마지막에는 블랙코미디 같은 연출으로 시종일관 해맑게 나왔던 선우신 형사의 변화를 보여 주는데 한번 길을 잘못 드니 캐릭터들이 이렇게 일관성을 잃고 폭주하게 되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분명 아이디어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반전도 꽤 묵직한 한방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 긴 장편 소설을 쓰려니 기초공사가 부실한 집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기에 더 아쉬운 감상만이 남는다.


3. 이상한 책: 김진영 <마당이 있는 집>

드디어! 사실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었다. 이 책은 정말 이상할 만치 너무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 품어 왔던 나의 모든 예상과 기대에 이상적으로 들어 맞으면서도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기분 좋은 충격을 안겨 주는, 약간 또라이 같은데 또 그게 너무 좋은 그런 책이었다.

김태희, 임지연 주연의 <마당이 있는 집>을 보지는 못했지만 임지연의 신들린 듯한 연기라며 유명세를 탄 ‘남편 사망 정식’짤은 보았던 터라 대충 어떤 내용일지 짐작은 갔다. 모종의 이유로(아마 폭력이거나 바람이겠지)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여자들의 과감한 선택과 연대 이런 내용이겠거니 하고 안일(?)한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마치 그런 기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그 이상을 보여 주겠다는 자신감으로 이야기가 거침 없이 진행되어 간다. 후반부로 가면 대체 어떻게 마무리를 하려고 이야기가 이렇게 펼쳐지는지 예측 불가능한 재미를 선사하며 문자 그대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는데 실로 이런 재미는 아주 오랜만에 느낀 거라 기분 좋은 흥분이 꽤 오래 남아 있었다.

위에 언급한 <더블>이 (이렇게 비교해서 송구하지만)잘못 들어선 길로 폭주하는 느낌이었다면 <마당이 있는 집>은 제 갈 길을 확실히 알고 갈 데까지 가보자 하고 폭주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여성 버디물이라면 으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도 떠오르고, 가정폭력에서 후련하게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책 <나오미와 가나코>가, 끝까지 폭주하는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는 웹툰 <마스크걸>, 영화 <비밀은 없다>가, 그리고 후반부에 반전처럼 주란이 상은을 배신하려다 결국 상은의 손을 잡게 되는 부분에선 영화 <아가씨>가 떠오르기도 한다.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언젠가 <델마와 루이스> 역시 다시 보고 길게 리뷰하고 싶은데 이런 여성 버디물의 클래식으로서 어떤 작품을 봐도 항상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서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왔던 여자들이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연대하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부분까지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고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재미 있고 좋은 작품일텐데 이 책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과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너무 좋았다고 평하고 싶다. 거기에 진짜 범인에 대한 반전도 숨어 있는데 그에 대한 복선도 비교적 충실하게 잘 깔았다고 생각한다. 즉 여성서사물로서의 의의뿐 아니라 추리물로서도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으니 속는 셈치고 읽어 보시라 추천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끝 부분 주란이 상은에게 남긴 말이 이 책을 완벽하게 완성시켜 준 것 같아 그 말을 옮겨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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