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무더위를 K-미스터리로 잠시나마 잊어볼 수 있다면
K- 로 시작하는 접두어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양념치킨을 먹고 카메라 앞에서 계산된 리액션을 펼치는 외국인들(주로 하얀 피부의 서구권 출신들)에게 “엣헴 양놈들아K-치킨 맛이 어떠냐”고 짐짓 유쾌한 척하는 국뽕 류의 컨텐츠에 주로 쓰여서 그럴 지도 모르고. 애초에 ‘k’로 설명되는 한국과 한국적인 것의 범위 안에 묶이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원치는 않았지만 이 땅에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왔으니 나는 K-사회와 문화의 맥락에 대해서는 부가적인 설명과 의문 없이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요즘은 K-미스터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는 중이다. 우선은 한국형 미스터리에서 다루는 배경이나 소재에 대해서도 그만큼 이해도가 높고 수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한국형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똥폼 잡는 중년 아저씨들과 룸싸롱, 서비스 삼아 넣는 젊은 여자와의 정사 신 같은 것만 생각났기에 거부감이 컸고 관심 또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K-미스터리는 젊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유입되며 다양한 소재와 캐릭터 발전하고 있다. 머릿속으로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서양이나 일본의 지리나 혹은 몰입하기 어려운 정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여태까지 살아 온,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그대로 소설에 옮겨져 있다. 그래서 친숙하며 또 각별하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장마와 후덥지근한 무더위가 반복되는 요즘, 시간 보내기 좋은 K-미스터리들을 몇 편 뽑아 소개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 K-무더위에는 K-미스터리로.
- 박연선 / <이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동갑내기 과외하기><얼렁뚱땅 흥신소> <연애시대>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20대 초반 백수 손녀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홀몸이 된 할머니와 함께 투닥투닥 하며 시골 작은 마을의 오랜 실종 미스터리를 파헤친다는 내용.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와 배경이 지배하는 농사 짓는 시골마을과 사투리 등등,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의 약간 투박하고 촌스러운 버전이라고 할까. 서양의 시골보다 한국적인 시골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이 사대주의라면 어쩔 수 없지만 솔직히 뜨개질 하며 쿠키와 홍차를 마시는 시골과 열무김치에 비빔밥 비벼먹고 일일드라마를 보며 죽이네 살리네 하는 시골 중에서는 소설 속에서나마 좀 전자 같은 세계를 접하고 싶다. 아무튼 순박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K-시골에 숨겨진 실종과 범죄가 백수 손녀와 입 걸걸한 할머니를 통해 드러나면서 그 아이러니함을 더한다. 다만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뛰어나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고, 제목과 소설의 배경이 지금에 딱 어울릴 뿐더러 작가의 필체가 너무 웃겨서 실실 웃으며 읽을 수 있어서 추천한다.
- 황세연 /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작가 황세연이 아주 예전에 <IMF나이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을 장편으로 늘린 장편소설이다.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경기도 도서관 어플에서 읽는 순간 어디선가 본 게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곧 나도 K-미스터리의 나름 고인물이 되었구나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동 작가의 <IMF나이트>를 장편으로 고쳐 썼다는 말이 작가 후기나 책 소개에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아무튼 90년대를 배경으로 IMF, 월드컵복권, 강남권 아파트 집값 등 그야말로 K-사회의 맥락을 아는 자만이 이해하고 와닿을 수 있는 소재들 덕분에 2020년대인 지금의 독자들에게 더더욱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 별다른 특산물도 없고 관광자원도 없는 어느 충청도 작은 동네의 자랑거리는 단 하나, ‘범죄 없는 동네’ 연속 수상기록이다. 그러나 어느 날 뜬금없이 마을 주민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범죄 없는 동네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한 시골사람들의 분투, 그리고 그 작고 단단한 카르텔을 파헤치는 외부인들의 사투가 코믹한 톤으로 그려진다. 얼핏 조용하고 순박해 보이는 시골마을에 숨겨진 비밀이라는 점에서 <이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와 비슷하고 또 필체와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더더욱 웃긴데, 예를 들어서 소를 키워서 파는 여인의 이름은 소팔희, 추락해서 죽은 남자의 이름은 추인락, 제2의 인생을 꿈꿀 수 있는 대박 복권에 당첨되어 강남 아파트 매매를 노리려던 남자의 이름은 신한국 등등이다. 그렇지만 마냥 웃고 넘어갈 수도 없는 것이, 2023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시선에서 이미 지난 90년대의 생활상과 그때 샀으면 진짜 대박이 될 수도 있었을 당시의 3,4억짜리 강남 아파트 등등이 아이러니함과 해학을 돋군다.
- 도진기 / <유다의 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추리소설 작가인 도진기의 장편소설이다. 1,2권으로 나누어진 분량이 실감나지 않은 만큼 쭉쭉 읽히는 속도감과 군더더기 없는 한국의 사이비 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사건인 백백교’를 소재로 하여, 백백교가 숨겨 놓았다는 어마어마한 자산과 백백교의 후계자들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 책을 빌려 왔을 당시, 주말이어서 밤을 새서 두 권을 순식간에 읽었을 정도로 속도감과 군더더기 없는 전개가 돋보인다. 한여름 밤의 무더위와 불쾌한 습기를 잊고 몰두할 수 있는 K-미스터리로써 추천해 보았다.
- 전건우, 강지영 외 / <프리랜서에게 자비는 없다>: 과거나 근현대사가 아니라 이제 최신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K-미스터리로 넘어가 본다. 한국의 장르소설, 추리소설이 꾸준하게 새 활로를 모색하는 방법 중 하나가 여러 작가들을 모은 엔솔로지 형식의 출판이다. 우연히 접한 <프리랜서에게 자비는 없다>는 전건우, 강지영 등 한국 장르소설 쪽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이라도 들어봤을 이름의 작가들이 ‘느와르’를 소재로 쓴 앤솔로지이다. 4대보험이나 고용안정성 등을 보장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직업인들을 자조적으로 풍자한 표제작 <프리랜서에게 자비는 없다>부터, <범죄도시 3>의 초롱이 캐릭터로 대표되는 문신돼지국밥충 중고차 딜러들 대신 카리스마 넘치되 인간미 있는 여성 중고차 딜러인 왕지혜 캐릭터를 탄생시킨 <중고차 파는 여자>등, 클래식한 추리소설에서 벗어나 이미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한국의 장르소설을 엿볼 수 있다. 몰입감이라기보다는 출퇴근 길이나 나른한 주말 오후에 가볍게 설렁설렁 읽으며 킬링타임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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