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 맑은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여름의 한가운데 유난히도 해가 쨍쨍하고 구름 한 점 없던 주말 뜬금없이 남산 돈까스를 먹고 남산 케이블카를 타자는 동생과 함께 무려 명동에서 '걸어서' 남산돈까스를 찾아갔다. 명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작은 소품샵과 서점을 같이 운영하고 있는 공간을 만났고 서점에서 약간은 무심하게 약간은 귀엽게 홍보하고 있는 책의 제목은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이었다. 입사한지 한 달 남짓, 그 어느 때 보다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 나에게 어리둥절한 경고를 하는 듯한 제목이었고, 요즘 회사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는 친구 J가 떠올랐다. 이 책을 얼른 읽어야지. 읽고 나서 괜찮으면 J에게 선물해야지. 꼭 그렇게 해야지. 하고 집 주변, 회사 주변 도서관을 모두 검색했는데 이미 인기도서였는지 예약대기가 몇 명씩 걸려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도서관에서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책을 좀 사면 안되나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는 책을 일단 읽은 다음에 살지 말지 결정하는 편이라 조금 구질구질해도 어쩔 수 없다. 

이전에 뉴스레터에 소개했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황선우 작가와 다정소감, 전국축제자랑의 김혼비 작가가 서로 주고받은 10개씩의 편지, 그러니까 20개의 편지를 묶은 서간 에세이다. 두 작가의 책을 모두 재미있게 여러 번 읽은 나로서는 너무나 읽어보고 싶은, 읽어볼만 한 책이었던 것이다. 두 작가는 친밀한 내용의 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약간은 느껴지는 거리감이 오히려 보는 재미가 있었다. 선우씨- 와 혼비씨-로 서로를 호칭하는 것 부터 제3자가 보기엔 약간 썸(?)을 타는 것 같은 재미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두 작가 모두 소소한 유머를 사랑하는 것은 이전 책에서도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에 특히 이런 문어체 처럼 보이는 구어체의 글 안에서 이번에는 어떤 유머를 담을지 기대가 됐다. 

제목인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는 황선우 작가의 룸메이트인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 이옥선 작가의 신작이자 첫번째 책 '빅토리노트' 에서 작가가 노자의 사상을 인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노자의 사상을 인용한 이옥선 작가의 책을 인용한 황선우 작가의 글을 인용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을 금지하고 대신 한 템포씩 느리게 가자고 이야기 합니다. 저보다 한참 오래 산 선배가 조금 느긋해도 된다고 얘기해주는게 참 마음이 놓여요 - 35쪽

새로 취업하고 나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과 생각은 '나만 잘하면 돼' 였다. 다시 구직을 하면서 정한 회사를 선택하는 여러가지 기준과 요소들에 정말 적합한 회사였고, 심지어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의 이점이 있었으며 막상 들어가보니 기존 직원들 모두 나보다 나이는 어린데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그래서 마침내 든 생각은 아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큰일이다. 모든 조건은 갖춰져 있으니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였다.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 까지 바짝 긴장한 상태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잠이 쏟아졌다. 불면증도 완쾌될 정도로 푹 자고 다시 일어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하는 한 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작지만 큰 울림을 준 그 구절이 나오는 부분을 읽자니 한 편으로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조금 더 여유를 갖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은 어떤 사상인지 궁금해져 아마 다음 책은 노자의 사상에 대한 책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몇 달을, 특히 여름을 번아웃 상태로 통과하면서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 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63쪽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J가 많이 생각났다. 벌써 1년여를 가까이 회사에서 여러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속상하고 울고 다시 회복했다가 무너지고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는 J에게 위로와 지지를 건네고 싶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의 선택을 응원한다고.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너의 옆에 있을것이고 같이 걸어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틀만에 책을 다 읽고 바로 책을 구매해서 장문의 카드와 함께 J에게 보냈다. 책을 받고나서 한 통화에서는 아직도 상황은 나아진 건 없지만 그 책을 보는 것 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힘을 얻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유창해지지 못할 언어로 서툴게나마 이런 것들을 서로 묻고 답해야 할 거예요. 가끔은 입을 닫고 가만히 거기에 같이 있어줄 수도 있겠죠. 터널 속으로 같이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빠져나올 때까지 지켜봐주면서요. - 113쪽 

그리고 역시 두 작가의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연대'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연대의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를 보면 1.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라고 나와 있다. 글이 작년 5월부터 올 봄까지 1년 동안 쓰여진 글이고 그 사이에 우리나라에는 여러 힘들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 이 밈으로 쓰이고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이 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과 연대의식은 점점 더 희미해져가고 있음을 몸소 느낄 수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끔찍한 이기심은 사회를 병들게 할 뿐이다. 책 속에는 여러가지 연대의 모습들이 나온다. 슬플 때 기쁠 때를 가리지 않는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자칫 오지랖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를 보며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오르는 함께함에 대한 끈끈함과 통쾌함을 느끼는 것 또한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성취에서부터 나온 감정일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 한 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 각자의 바쁜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여유를 가지고 뉴스레터에 글을 싣고 서로를 생각하며 안부를 전한다. 9월에는 오랜만에 무임승차 멤버들을 다같이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말그대로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드립을 던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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