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는 나는 진짜 과연 나일까?
최근에 어느 아는 동생을 처음으로 1대 1로 만나게 되었다. 모임 안에서 여럿이 본 적은 다수 있지만 1대1로는 딱히 계기가 없었기에 만날 이유도 없었는데(냉정하지만), 서로 부탁할 것이 있어서 만날 겸 식사도 하고 간단히 술도 마시면서 그동안 몰랐던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나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과 지레짐작 등을 솔직하게 들으면서, 나는 항상 똑 같은 ‘나’라는 한 명의 존재이지만 나와의 관계와 알게 된 시기 등등에 따라 얼마나 나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했다. 가족, 깊은 친구, 여럿이서는 친한데 1대1로 친할 정도는 아닌 지인, 회사 사람 등등 수없이 많은 층위의 지인과 엮이면서 사는 요즘 세상, 비록 현실의 나는 단 한 사람이지만 각자가 아는 나의 모습만큼이나 여러 명의 내가 존재한다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그들 각자가 묘사하는 ‘나’를 모아놓고 보면 전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똑 같은 사람 혹은 사건일지라 해도 각자가
얽힌 이해관계에 따라 각각 전혀 다른 기억을 만들어낸. 고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라쇼몽>이나, 맹인들이 각자 코끼리의 다른 부분만 만져보고 코끼리라는 동물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우화처럼.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둘러싸고 여러
명이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해설을 독자에게 들려주면서, 독자는 그에 따라 점점 사건의 감춰졌던
이면을 알게 되는 전개의 추리소설이 그래서 재미있다. 화자에 따라 똑 같은 인물도 다르게 평가하면서 입체적인
인물들이 살아 숨쉬게 되고, 얼핏 단순해 보였던 사건이라도 뒤로 갈수록 다양한 인물들의 입장과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최근에 읽은 추리소설 중 이렇게 여러 명의 화자를 통해 다중 과점을
적용한 소설들을 간단히 추천해 보고자 한다.
- - 이케이도 준 <샤일록의 후예들>: <한자와 나오키>등의 메가히트작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작가 이케이도 준의 매우 초창기 작품으로, 작가 스스로가
‘나의 원점’이라고 칭할 정도라고 한다. 은행 출신으로 은행원들의 세계를 소름끼치게 잘 그려내는 이케이도 준의 장점을 살려, 어느 시중은행
지점에서 일어난 은행원 실종 사건을 다양한 직원들의 관점에서 돌아가면서 서술한다. 오로지 실적이 전부인 비인간적인
은행이라는 자본주의 정글 속, 모두 각자의 이유로 절박한 은행원들으 이야기가 각자의 시점에서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결말에서 깔끔하게 은행원 실종 사건의 모든 전말이 밝혀지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낸 점은 조금 답답하지만,
새로운 화자마다 각자의 솔직한 속내와 숨겨진 비밀이 자꾸 드러나는 전개가 재미있어서 술술 읽힌다. 그야말로 인간 군상극 그 자체.
- - 기노시타 한타 <삼분의 일>: 유흥주점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직원들이 짜고 은행강도
연극을 벌이고, 그 뒤처리와 돈의 배분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는 과정을 복수의 화자가 계속 번갈아 가면서 서술하며
사건이 전개된다. 이런 다중 관점 형식의 재미를 한껏 잘 살린 소설로, 별로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가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을 정도이다. 적절한 서술 트릭이 허를
찌르고, 고정된 복수의 화자를 통해 각자 숨기고 있던 뒷이야기가 계속해서 드러나며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못해 모든 챕터가 다 반전이다.
- 누쿠이 도쿠로 <우행록>: 사건보다는 똑 같은 인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편 추리소설이다. 사실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기억이 나고 대충 줄거리도 알긴 아는데, 얼마 전 대림도서관에 갔다가 눈에 띄기에 또 빌려 와서 읽었다. 아예 모든 장이 어느 일가족 살인사건을 둘러싼 관계자들이 인터뷰에 응하여 증언하는 형식이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을 비웃듯이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전달하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위하여 타인에 대한 왜곡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의 속내가 뻔뻔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근친상간과 같은 역겨운 소재가 사회 고발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자극적인 전개를 위한 소재로만 쓰인 것이 느껴져서 뒷맛이 찝찝하고 거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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