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 수많은 지금 그리고 다음 소희들
며칠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길래 무심코 받았다. 기계음으로 ‘고객님 신한카드~’ 음성이 나오길래 흔한 스팸전화라고 생각하고 바로 끊으려던 차, 기계음 안내원이 나에게 신한카드 대금이 연체중이어서 연락 드린다며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음성으로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깜빡하고 신한카드 이번 달 대금을 계좌에 이체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콜센터에서 사람이 직접 전화할 필요 없이 이젠 AI봇이 고객과 음성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고 보니 은행, 카드 어플 등에서도 기본적인 질문은 챗봇으로 전부 해결할 수 있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 직업인 고객상담원들의 고충이 이 AI 기술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것인지, 혹은 또 하나의 진입장벽 낮은 저숙련 일자리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일까.
올해 화제가 된 독립영화 <다음 소희>를 넷플릭스로 보았다. 백상예술대상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는 등 상당히성공한 독립영화라 하겠다. 학교와 기업의 협력프로그램 일환으로 대기업 L모 통신사의 콜센터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던 전주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고객들의 갑질과 기업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고통받다가 세상을 등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희는 춤을 좋아하고 잘 춰서 연습도 열심히 다니고 술자리에서 쓸데없이 시비거는 찌질한 남자들에게 통쾌하게 할 말은 하고 사는 당당한 성격의 고등학교 3학년이다. 당찬 19살 소녀는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좋은 실적에 대해 제대로 인센티브도 받지 못하지만 오히려 너무 해지방어를 잘 하니까 소희 때문에 상사들의 기대 실적이 높아져서 힘들다며 소희를 욕하는 동료들, 각종 욕설, 성희롱으로 괴롭히는 고객들, 진상들로부터 직원을 보호하기는커녕 고객보다도 더 닦달하고 몰아붙이는 관리직과 회사, 그리고 힘들게 대기업에 학생을 보냈는데 니가 여기서 그만두면 우리 학교는 뭐가 되냐며 소희의 고통을 그저 집단을 위해 당연히 견뎌야 할 몫으로 치부하는 학교 등에 의해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배두나가 소희와 같은 댄스연습실에 다녀서 소희와 안면이 있던 형사로 출연한다. 사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내용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유명 배우인 배두나가 형사로 나오는 것 외에는 너무 과한 감정몰입 없이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독립영화인데, 이 잔잔함이 오히려 현실성을 배가시킨다.
콜센터나 온라인 고객센터 등에서 고객들을 직접 대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처우와 진상 고객들에 대한 이슈는 사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이야기되어 왔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결말이 따로 필요할까?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자체가 <다음 소희>의 결말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소희의 다음이 될 소희들은 끊임없이 있다. 나는 다음 소희들에게 어떤 고객일지, 아니 내가 다음 소희가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또 어디 있을지, 요즘처럼 AI가 감정노동을 대신해 준다면 그만큼 줄어든 일자리는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하는지 등 수없이 많은 고민과 의문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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