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구조 발견의 히든피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생각하며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고작 약 1%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연구 결과가 있다. 침팬지는 인간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는 영장류이니 여기까지는 그렇다 해도 인간과는 아주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초파리마저도 DNA차원에서 비교하면 인간과 50%가량 일치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 덕분에 초파리는 의학실험의 단골이라고 하니 DNA가 품고 있는 방대한 정보를 두고 ‘생명의 비밀을 여는 열쇠’ 등으로 비유하는 흔한 수식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DNA의 구조를 밝힌 사람은 누구일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기록으로 말한다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증명한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를 꼽겠지만 그 기록에 숨겨진 주인공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영국 태생의 여성 과학자로 여성에겐 정식 학위조차 수여되지 않던, 아마도 과학계에서 여성과학자에 대한 배제가 만연하던 시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화학과 결정학*을 공부한 후 X선 회절분석*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 DNA가 생명의 비밀을 풀 중요한 열쇠라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지만 정작 그 구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었고, 당대의 유명 과학자인 라이너스 폴링은 DNA의 구조가 삼중나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X선 회절분석을 통해 얻어낸 그 유명한 ‘51번 사진’은 DNA의 구조가 사실은 이중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고 이를 통해 왓슨과 크릭은 본인들의 가설을 입증하여 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사연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DNA의 구조를 연구하던 킹스칼리지의 로질린드 프랭클린과 윌킨스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프랭클린이 킹스칼리지에서 버크벡으로 연구소를 옮기려던 중 윌킨스가 왓슨에게 프랭클린의 동의 없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명확히 찍힌 ‘51번 사진’을 보여주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프랭클린이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또한 크릭에게 공유되어 프랭클린의 연구 결과가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음에도 그에 합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연구윤리를 명백히 위반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으나 도덕적으로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에 그 점이 여전히 프랭클린을 노벨상을 빼앗긴 비운의 과학자처럼 보이게 한다.

DNA의 구조를 밝혀낸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면이 있고, 왓슨과 크릭이 ‘51번 사진’을 얻게 된 경위 또한 여러가지 요인이 결합되어 결과적으로는 프랭클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최근에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재조명하며 노벨상을 빼앗긴 ‘비운의 과학자’처럼 묘사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다만 간혹 드라마틱하게 묘사되는 것처럼 프랭클린의 공을 가로채기 위해 사진을 몰래 훔쳤다거나 의도적으로 그의 공을 은폐하려 시도한 것은 아니니 이에 대해 더 자세하고 객관적인 설명을 듣고 싶다면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의 ‘격동 500년’, 또는 유튜브 <클래식 클라우드>의 ‘책보다 여행’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 편을 듣기를 추천한다.(위에 적은 내용 역시 이 두 콘텐츠를 통해 정리한 것이 크다는 것을 밝혀 둔다.) 또한 브렌다 매독스가 집필한 프랭클린의 전기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가 그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공과 업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과학자를 생각하는 것은 이런 사연보다 그가 당사자로서는 억울했을 법한 ‘51번 사진’ 사건 이후에도 묵묵히 연구의 길을 걸어나간 데에 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버크벡칼리지로 옮긴 후에도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연구에 큰 성과를 내며 연구를 정진하지만 1956년 만35세가 되던 해에 난소암을 진단 받고 약 2년을 더 살다 1958년 만37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놀라운 점은 난소암 진단을 받고서도 1956년에 논문 일곱 편, 죽기 바로 직전 해인 1957년에는 논문 여섯 편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좌절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묵묵히 연구를 한 그 굳은 심지 혹은 의연함을 생각하면 약간 경건한 마음이 든다. 나는 아주 작은 좌절에도 남 탓을 하기 주저하지 않고 그걸 핑계삼아 안주하고 싶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그의 인생을 내 나름대로 기록하고 싶어졌다.

성과를 도둑맞고 뺏기기만 한 비운의 과학자는 아니더라도 당시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과학계에서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남기는 분명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인생을 이토록 밀도 있게 살아간 그가 DNA의 다크레이디가 아닌 위대한 과학자로서 더 널리 조명되고 더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결정학: 결정의 구조 및 결정의 물리적·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네이버 지식백과 화학용어사전 참고)


*X선 회절분석: X선을 결정에 쪼여 그 반사되는 현상을 통해 분자의 구조를 알아내는 분석법(시청한 유튜브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여 가장 간단하게 요약하였으므로 틀렸을 가능성이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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