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빌런 고태경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다니던 도서관이 3개월 간의 공사로 휴관했다가 재개관을 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새로운 책들을 빌리려니 기대가 됐다. 재개관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대출해가지 않은 인기 도서들도 몇 권 빌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온 지는 꽤 됐지만 꾸준히 추천 도서 목록에 있었던 'GV빌런 고태경'을 대출할 수 있었다. 나는 문학 소설 보다는 비문학과 에세이를 주로 읽는 편이다. 주로 라기 보다는 문학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2시간~3시간을 집중해서 깊은 이야기의 흐름에 빠졌다 나오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영화의 진지함이나 심각한 분위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것도 몇 번이나 시도해 봤다. 가볍게 읽기 좋은 추리 소설 부터 요즘 유행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소설들까지. 제대로 소설을 읽어본 것은 대학 때 이후로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뭔가 분석하고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만 같기도 하고, 주인공에 쉽게 감정 이입하기 어려운 면도 소설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류의 글들을 훨씬 더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내게 'GV빌런 고태경'은 꽤나 도전에 가까운 독서였다. 영화와 영화인을 소재로 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이 아주 흥미진진하거나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지만 두 세 챕터를 읽어나가자 그냥 책을 붙잡고 술술 읽게 되었다. 이번 소설 만큼은 완독을 해보자는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를 충분히 북돋아 줄 수 있을 정도의 흥미로운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반하자"

고태경은 마치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반반하자는 듯이 툭 말했다. 

"자네도 살아야지. 어떻게 다 자네 책임이야. 반반 해. 상황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잖아. 네 탓만 하지 말고 세상 탓도 절반 하자고."

고태경에게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물랐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을 줄은 더욱 몰랐다. 

"비싼 수업료 치른 거로 생각해. 실패도 못해본 사람들이 수두룩 해. 실패에 자부심을 가져."

- 137쪽 

계속되는 실패에 자기 탓을 하며 자신을 원망하는 조혜나에게 고태경이 무심한 듯 전하는 위로의 말이다. 그렇다 세상은 반반이다. 모든 걸 내가 짊어지고 내 탓을 하면 나만 괴로워 질 뿐이다. 그 때의 상황과 다른 조건들과 여러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나에게 주어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내 탓만 하며 나를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회복은 점점 늦어질 뿐이고 복구는 어려워 질 뿐이다. 그런데 대학 입학 이후의 내 삶을 돌아보면,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산 건지, 실패도 못해 본 삶을 산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실패는 뭔가 도전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아깝게도 이루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뭔가를 이루려고 눈물나게 노력해 본 적이 있던가? 물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시도를 해보기는 했지만 도전에 실패했다고 하기에는 그냥 시도의 단계에서 멈춰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수두룩한 실패도 못해본 사람들 중에 하나가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한 위로의 말에 오히려 공격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너 다른 거 뭘 하려고?"

"할 거 없어, 아직은. 그런데 더 이상 다른 거 할 게 없어서 영화에 매달리지는 않을 거야."

영화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승호가 단지 자신이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202~206쪽 

끝까지 영화를 붙들고 실패를 두려워 하며 도전하는 조혜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영화에 대한 미련을 접고 사랑하는 대상으로 남겨 놓는 승호와 같은 사람도 있다. 더 이상 다른 거 할 게 없어서 영화에 매달리지는 않을거 라는 승호의 말이 나의 마음 같았다. 인생의 고민으로 남을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균형을 찾는 삶> 을 고민하게 만든 춤 이라는 존재가 생각났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춤추는 것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문화센터에 댄스스포츠를 배우러 다니던 그 때부터 였을까, TV속 연예인들의 춤을 따라하며 장기자랑을 연습할 때부터 였을까. 대학에 가서는 문예단을 하기도 하고 댄스스포츠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춤으로 먹고사는 방법을 일찍 깨달아 뭔가 도전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엔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찾는 것으로 잠깐의 방황, 아니 꽤 길었던 방황은 마무리 되었다. 나는 적잖은 시간을 스스로를 미워했던 것 같다. 제대로 도전해보지 못한 삶, 그냥 삶에 둥둥 떠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흐름에 맡기던 삶을 살았던 긴 방황의 끝에 이제는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춤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다시 나아가는 중이다. 다른 거 할 게 없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서 하게 된 지금의 일에 만족하고, 더 잘하고 싶고 더 잘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는 실패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인생이 '원 찬스'가 아니고 내가 다 날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와 연출 노트를 열심히 쓰면서.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 255쪽 

어떻게 보면 진부한 결말일 수 있지만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한마디 이다.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는 삶.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다. 실패를 할 수도 있고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계속해서 뭔가 굴러가고 있다면 그것은 기회로 향하게 될 것이다. GV빌런 고태경은 목표가 있든지 없든지 그저 멍하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는 것처럼 삶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꾸준히 하는 것. 그런 일들이 하루하루 살아갈 힘이 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아마 아침부터 집중해서 읽었다면 몇 시간 만에 다 읽었을 수도 있다. 소설에 한 발짝 가까이 간 기분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가벼운 소설들만 읽을 수는 없겠지만 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지. 마포, 상암, 종로, 을지로 등 내가 익숙한 공간 들이 배경으로 나온 것도 이야기에 집중하는 데 한 몫을 했다고 느껴진다. 실제로 거리를 걷고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 마치 웹툰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혜나가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다큐멘터리의 메이킹 필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내용이나 시점이나 이야기의 무게가 소설 초보들이 보기에 딱 적당해서 왜 추천 도서에 계속 이름을 올리는 지 알 것 같았다. 소설 고수들이 가볍게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책일 것 같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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