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비워내기, 대신 그만큼 담고 채우기

  

 

상실과 비워내기, 대신 그만큼 담기. 나의 2023년을 이렇게 정리하며 올해 마지막 무임승차 뉴스레터에 한 발을 얹는다.

 우선은 2022년까지 포함해서 나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들의 상실을 줄줄이 겪었다. 어쩌면 내 나잇대를 생각하면 조금 늦은 편인지도 모른다. 정말 가까운 사람들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경험. 여태까지는 TV등을 통해 나만 일방적으로 알거나 혹은 친척이라고 해도 굉장히 먼 친척이어서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분들이 이제 없다. 바쁜 일이 끝나면 전화를 해야지, 근처 동네에 놀러갈 일이 생기면 잠깐 얼굴 보고 빵이라도 사드리고 와야지, 이런 지켜지지 않은 내 안의 약속들이 허망하고 죄송스럽다. 나중에 내가 그분들을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래도 나를 구박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예전보다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죽으면 어디로 갈까?와 같은 추상적인 의문조차 좀더 무섭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자기 손으로 시작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우연히 나라는 인간으로서의 인생에 내던져졌으니, 적어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길 바란다. 먼 훗날 내가 떠나는 날이 오면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모여서 피자나 연어, 닭칼국수 같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다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맥주나 마시면서 나에 대해 재밌고 서운했고 미안했고 고마웠던 이야기나 나누어 주면 고맙겠다. 

 삶과 죽음 같은 추상적 고민을 하다 보면 결국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정해진 답에 도달하는데, 죽기 전에 내 한 몸 뉘일 나만의 공간을 위해 집 매매와 독립 등의 아이디어에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국가에서 인정해 주는 청년의 나이 범위에서 벗어난 첫 해, 이런저런 계획을 머릿속으로 하는 것 만으로도 괜히 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에 젖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비워내기부터 해야 하는 것이 나의 구질구질한 현실이리라. 우선 정확히 11살 때부터 살고 있는 나의 이 방을 좀 비워내야 한다. 2020년 귀국 후 낡거나 살쪄서 못 입는 옷들을 수도 없이 버리고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그 외의 온갖 잡동사니와 생활용품들을 버리고 또 버리고 했는데도 여전히 내 방은 나와의 25년살이를 증명하듯이 여전히 꽉꽉 차 있다. 다시 들여다보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악착같이 모은 온갖 잡동사니와 내 초중고 그리고 20대의 흔적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추억도 생각나고 내 기억의 조각들을 버리는 것 같아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싹 비우고 미래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비워내고 있는데도 내 방에 좀처럼 여유공간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더 정신없는 이유. 내 돈으로 정가 주고 살 일은 평생 거의 없을 명품들이 방에 굴러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보세와 SPA 브랜드보다 싸게 산 의류, 액세서리 등으로 가까운 친척들에게 생색을 내고 부탁받은 친구들을 위해 대리구매를 해 주고 그 와중에 상자는 아까워서 못 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회사에 입사한 덕분에 나와 내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비싼 물건을 헐값에 많이 살 수 있었다. 얼마간의 물욕과 허세를 한창 충족하고도 남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내 기준)풍요로워졌다.

 나 스스로와 지인들을 위해 명품을 싸게 살 수 있는건 내가 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덕분이니 따지고 보면 입사 후 1년 간 내가 한 고생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오랜 물경력에 대한 일종의 벌이라고 할까, 어제 걷지 않아서 오늘 뛰어야 하는 느낌으로 올해 1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안 해본 업무 내용도 많고 나 같이 내 분야에 지식 없고 일 못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1년 내내 우당탕탕 정신이 없었다. 물론 직무 내용만 보면 누군가에겐 또 물경력일 수는 있겠으나 나에게는 벅차고 어려웠다. 아마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2023년 마지막 영업일까지 내가 저지른 실수들을 다음 주에 어떻게 커버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 덕분에 빈약했던 나의 커리어가 그나마 올해부터 창피하지는 않은 수준으로 채워졌다.

 귀국 후 우연히 시작하게 된 보육원 아기와 1대1후원이 어느새 3년째가 되면서, 후원을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갓난아기였던 후원아동이 최근에 3살 아이가 되어 어린이집에 다닌다는 엽서가 날아왔다. 내 아이는 아닐지언정 그 아이의 성장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마음 속에 담는다. 2024년 마지막 글을 쓸 때가 오면  나는 또 무엇을 잃고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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