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을 맞아 값진 무언가를 기대하며
(나의 취향이 고루한 건지, 대부분이 비난하고 선호하지 않는 공무원 특유의 말장난식 카피를 좋아해서, 제목에 한 번 시도해보았다. 과감하지만 또 소심하기도 한.)
보통 많이들 알고있기로는,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외부에 공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들끼리도 새해 목표를 공유하고 응원해주고 때로는 연말에 지켜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반대의 의견을 보았다. 목표를 '공표하는 순간'부터 이미 목표를 이룬 것처럼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시작이 반이니까) 도리어 의지가 해이해질 수도 있다는 것. 한편으로는, 타인의 반응이 나의 기대만큼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말리고 겁주고 힘을 빼놓을 때도 있기 때문에, 굳이 동네방네 소문내지 말고 무언가 하고자 마음 먹었다면 묵묵히 '그저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입 밖으로 낸 목표를 이룬 적이 드문 나로서는 (반성합니다) 새로운 설명에 깨달음을 얻어 앞으로는 새해 목표를 공표하지 않으려고 한다. 새해 목표를 안 세워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다만, 새해에 기대하는 바를 나열해두고, 연말에 지난 기억들과 맞춰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어서 올해도 몇 가지 꼽아보려고 한다. 죽더라도 '이것' 다음에, 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책상 서랍 속 간식을 쟁여두듯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
[영화]
2월은 언제 올까요. 벌써부터 개봉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장재현 감독의 '파묘'. 검은사제들과 사바하 등을 연출했던 장재현 감독의 신작인데, 예고편을 보고 굉장히 설렜다. 배우들 (특히 김고은!) 의 에너지, 생생한 불길함같은 것들이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몰입할 만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비범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 선뜻 좋아하지도 못하는 쪽이지만, '가여운 것들'은 궁금하다. 더페이버릿을 보며 엠마 스톤을 이렇게 써먹을 수도 있구나 싶었기 때문에.
그나저나 마블의 기세도 이제 한풀(어쩌면 네다섯풀일지도) 꺾인 상황이지만, 헐리웃의 시리즈물에 대한 집착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게, 나조차도 데드풀3라거나 존윅의 스핀오프라거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다음 작품이라거나 매드맥스 프리퀄이라고 하면 아묻따 영화관에 달려가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책]
며칠 전 병원에 갔더니, 뭔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기다리던 중에 간호사쌤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근데 저기요' 내가 들고 있던 책을 가리키며 '그 책 재미있나요' 물었다. 순간 간호사쌤이 앉아있던 책상 위에 놓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책이 보였다. 오, 책을 좋아하는 사람! 갑자기 호감이 치솟는다. 그러나 내가 들고있던 책은 '퓨처셀프'. 이 책이 나쁜 것은 아닌데, 강력하게 추천하기엔 뭔가 아쉽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니, 간호사쌤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그 책(퓨처셀프)과 이 책(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중에 엄청 고민하다가 이 책을 골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잘하셨다고, 아무래도 그 쪽이 고전이라 더 좋을 것 같다며, 퓨처셀프는 도서관에서 빌려보세요 라고 했다. 그러자 간호사쌤이 '그렇게 별로인가요' 하며 아쉬워하셨다. 마침 검사 때문에 어영부영 그 대화는 마무리됐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2024년 독서 방향을 정했다. 이 일화가 왜 기억이 남았나, 에 대한 해명이자 반성으로. 첫째 잘난척 하지 않는 독서를 하자. 솔직히 퓨처셀프를 읽으며 무심코 비관하고 은근히 무시했던 것 같다. 기왕 책을 펼쳤다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둘째 대화할 수 있는 독서를 하자. 책을 '읽어내는' 데에만 치우치지 말고, 책의 내용이 어떤지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공유하고 싶은 게 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독서해야겠다. 누군가 책에 대해 물었을 때 듣고싶어 할만한 대답을 해줄 만큼. 맨날 '사서 보세요' '도서관에서 빌려보세요' '그냥 시간나면 보세요' 정도만 말하다보니 뭔 미슐랭 별점 봇도 아니고 책을 봐도 본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제 '다독'이 아니라 '숙독, 다상, 다작'에도 힘써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좋은 책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간호사쌤이 보여준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정말 추천도 인용도 지겹도록 많이 봤는데 정작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퓨처셀프와 제대로 비교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게 유명하고 좋은 책이란 건 알지만, 가끔 어떤 타이밍을 놓치면 그 책과의 연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제때 그 책이 읽고 싶어지면 읽어야지.
[전시]
올해 예고된 대형 전시 중 가장 주목받는 것 중 하나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뭉크전일 것 같다. 오슬로에 여행갔을 때 만났던 음울하고 서늘하던 그 작품들을 다시 한 번 만나보면 어떨까 몹시 궁금하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던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노먼 포스터의 개인전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계획중이라고 한다. 건축이라는 테마는 늘 내게 매력적이기 때문에 역시나 기대 중이다. 필립 파레노나 엘름 그림 & 드라그셋 같은 작가들도 매우 유명하고 주목받는 것 같은데 사실 난 잘 모른다. 그러나, 모른다고 뒷걸음질치면 후회하게 되더라. 예를 들어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22년도에 했던 안드레아스 거스키 사진전은 낯설다는 이유로 망설이다가 전시가 끝나고서야 뒤늦게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간과 기운이 날 때는 고민하지 말고 질러야겠다. GO!
[음악]
올해는 무려 에프엑스가 15주년, 레드벨벳이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고 한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란 건 알지만, 크리스탈이 솔로 앨범 한 번 내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변방에서 끄적이기라도 해본다. 레드벨벳도 뭐 하나... 안 주려나...? 주면 좋겠는데. 타이밍 너무 딱인데. 더보이즈는 이제 7년의 1차 계약이 끝난다. 벌써 7년이라니. 정말 여러모로 더보이즈는 나에게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하는데, 어떨 때는 정말 기대보다 못했다는 아쉬움 섞인 분노, 어떨 때는 그래도 여기까지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싶은 어이없을 정도의 신기함?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더보이즈를 지켜봤던 그 모든 이들이 떠났고, 나도 23년의 3연타는 치명적이라 그야말로 스킵해버려서 길거리에서 들려도 못 알아들을 정도지만 (애초에 길거리에서 들을 가능성조차 없다고 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엘지트윈스도 우승을 했는데... 라는 마음으로 24년을 기대해보려 한다. 데이식스는 뭐 말해 뭐해!! 내 플레이리스트에 빈자리 많으니까 어서어서 들어오라구.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클래식 음악을 좀 들어보려고 한다. 허세가 아니라 부정하긴 어려운데, 허세면 뭐 어떤가, 내 세상의 지평을 넓히는 건데. 최근에 카라얀과 번스타인에 대한 글을 읽어서인지 일단 그 둘부터, 기왕 례술충의 허세를 키우자 맘먹은 김에 말러까지도 도전해봐야겠다.
[그 외]
유독 기억에 남는 여행지에서의 맛집이 있다. 바르셀로나의 츄레리아나 뉴욕의 루크스랍스터 같은 곳들. 내가 그 도시에 다시 가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두 군데 모두 현대백화점 팝업으로 행사를 한다는 것! 생각해보니 정말 '절대적인' 것이란 없고,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나기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허무하게 없던 것처럼 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런 걸 먹을 것으로 새삼 다시 깨닫다니.... 그리하야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맛있는 걸 많이 많이 먹으러 다니기로 다짐했다. 미루지 말고 아끼지 말고 (돈은 좀 아껴야 할텐데)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24년의 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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