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의 해부
남편의 갑작스러운 추락사,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키우는 개가 전부, 남편을 잃은 아내에서 일순 남편을 아래로 떠민 유력한 용의자가 된 아내. 남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라는 흥미로운 시놉시스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걸출한 타이틀까지. 추락의 해부를 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무척 기대했고 (또 육아 이야기를 꺼내서 민망하지만)아기를 낳은 이후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보는 거라 무척 설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라는 흥미 측면에서는 절반의 성공. 대신 법정에서 낱낱이 밝혀지는 부부라는 외피를 둘러싼 관계의 실체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주어진 사실을 통해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꿰어나가며 어느 쪽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하는, 즉 보여지는 것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로 귀결되는 묵직한 의문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겠다.(대충 설렜던 것 만큼의 오락적 재미는 없었지만 충분히 볼 만한 가치는 있다는 뜻;;)
남편의 추락을 두고 한쪽은 남편의 자살을 다른 한쪽은 아내가 남편을 떠밀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부간의 관계는 적나라하게 법정에서 공개되고 만다. 베스트셀러인 아내와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남편, 이상적인 엘리트 가정처럼 보이지만 남편은 작가로서 잘나가는 아내에 비해 글을 쓰지 못한다는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로 인해 이미 둘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 위태위태한 부부관계와 서로의 결점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매끈히 윤색된 삶 뒤 감추고만 싶은 부박한 삶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두고 과연 어느 쪽 이야기가 더 믿음직스러운지 관객은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여기서 생기는 긴장감과 메시지가 영화의 핵심요소로 보인다. 비록 극에서는 남편의 추락사, 즉 자살로 판결나지만(조금 딱딱하고도 영화의 메시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법정이었다고 해도 무죄로 판결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을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라는 판결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ㅎㅎ) 개인적으로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두었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자살로 판결나게 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 것이 그저 ‘수면제를 과다복용 한 적이 있다’는 정황 증거 뿐이고 그마저도 심적으로 엄마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진술로써 입증되기 때문이다.(물론 극에서 아들은 미처 몰랐던 부모의 갈등을 알게 되면서 진실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남편이 떨어진 위치와 사체의 부딪힌 흔적은 자살보다는 타살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는 점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의 판결과 무관하게)관객이 믿는 방향대로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맡겨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이기 때문에 막판에는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국 온전한 진실이란 누구도 알 수 없고 우리가 믿는 대로 진실이 구성된다는 꽤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셈이다.
영화는 부부의 갈등과 싸움을 드러내는 장면 외에는 시종일관 건조하다. 격렬히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대신 법정에서 진실을 가려내기 바쁘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열한 공방 끝에 무죄로 결론났다 한들 이미 추락해 버린 사생활과 가족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기에 기쁨은커녕 씁쓸함만 남게 된다. 하여 모든 재판이 끝나고 집에서 조용히 개를 끌어 안고 잠에 드는 산드라(아내)의 쓸쓸한 모습이 큰 여운을 남긴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영향을 받은 영화로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언급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부부간의 적나라한 싸움 장면과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에피소드가 커다란 싸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 한때는 상대에게 매력을 느꼈던 점이 이제는 상대를 미워할 구실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결혼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불어 하나씩 드러나는 증언과 사실 속에서 보는 관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시드니 루멧의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두 영화 모두 <추락의 해부>와 결은 다소 다르지만 추천하는 바이다. 또한 아래 링크를 통해 감독이 <추락의 해부>를 만들면서 참고한 영화를 알 수 있으니 시간이 난다면 한 두편 쯤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영화사에 고전으로 남을 법한, 상당히 평이 좋은 영화들 같으니 말이다.(https://m.blog.naver.com/cine_play/223348321728)
마지막으로 영화와는 거의 무관한 단순히 제멋대로의 감상이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지점에서 <파이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도 말이 된다는 가정하에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믿을 것이냐 혹은 적당히 동화 같고 환상과도 같은 이야기를 믿을 것이냐 선택해야 한다면 기왕이면 후자를 택하고서는 이것이 이 씁쓸하고도 냉정한 영화를 가급적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우기면서!(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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