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

 


요 며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연달아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린 줄 알고 새 책을 구매했는데 결국 백팩 안주머니에서 발견한 것이라든가 (어쩐지 가방이 너무 무겁다 했지), 지난 주말 불을 다 끈채 깜깜한 와중 벽에 그야말로 빡! 하고 안면부를 들이박은 것이라든가 (결국 일요일에 여는 병원을 급하게 찾아 엑스레이와 씨티를 찍고 뼈가 우그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필라테스 수업 예약 때 달력을 잘못 보고 엉뚱한 일정으로 해놔서 몇 개 빼먹은 것 (심지어 경쟁이 치열한 쌤 수업 예약에 성공했다고 좋아해놓고!) 등등. 원래 남탓도 못하게 온전히 스스로의 어리석음만으로 촉발된 사건들의 설움이 더 큰 법이라, 잠들기 전 괜히 찌질하게 찔끔 눈물을 흘리곤 했다. 


왜 나는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 걸까. 왜 보이는 것은 보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까. 인간은 보고싶은 것만을 보는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보이는 것은 보여주는 것보다 클까. 그렇다면 보여주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 것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단순한 자책이 제법 추상적인 의문으로 이어져 최근 접한 콘텐츠들과도 연관지어 생각해보았는데, 궁극적으로는 모든 텍스트를 소비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 안 보여주는 것.


‘파묘’는 앞서 말한 키워드가 너무나 중요한 영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크다. 그것의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기에 해리포터의 ‘보가트’처럼 맞춤형 공포를 선사한다. 덕분에 형체도 두려움의 한도도 제한되지 않고 최대한으로 증폭된다. 영화 속에서 그저 ‘겁나 험한’ ‘무언가’라고만 지칭될 때 관객은 각자의 상상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무섭고 가장 자극적인 것을 떠올리게 된다. 후반부 무언가의 형체가 확정될 때 다소 힘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것이 처음부터 확정적이었다면 별개 장르로서의 기대 충족이 가능하겠지만, 오컬트는 심지어 어원조차 ‘숨기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아낌없이 보여주는(!) 장재현 감독의 대중영화를 다루는 감각을 옹호하고 싶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 이어 파묘까지 그는 늘 관객의 질문에 준비되어 있었고, 나아가 시야의 범위를 벗어난 의도의 해석마저도 품는 재치가 있다. 예를 들어 컨버스를 신고 마샬 스피커를 켜서 굿을 하는 장면은 단순히 힙한 무드를 자아내는 것 이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을 해석하게 하고 현재성을 메타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위기-절정 단계에 이를 때 인물들의 동인이 전개까지와는 다르게 단순화된다는 측면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원래 오타쿠를 몰입하게 하는 것은 여지없이 꽉 채워진 불후의 명작이라기보다, 어쩐지 엉성한 틈새가 있더라도 그 사이를 상상하게끔 자극하는 엣지있는 작품들인 법. 우리는 화림과 봉길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오독하고, 음험한 '그들'의 과거를 과장하며, 상덕과 영근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감독이) 보여주는 것을 (관객이) 보고 싶었던 것으로, (감독이) 보고 싶었던 것을 (관객이) 보는 것으로 치환시키는 과정이 된다. 보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치사한 간극이 없고, 말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하기에, 이 영화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


'파묘'에 대해 (오타쿠적) 깊생을 하고 있자면, 책 ‘걸작과 졸작 사이’가 떠오른다. 미술작품에 대한 책이지만, 저자가 꼽은 여러 가지 걸작의 조건 중 인상 깊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미 부여. 즉,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조차 없다면 졸작이 될 것이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고민이 없다면 걸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와 고민이 제대로 구현되었을 때 그래서 그것이 잘 보일 때, 누군가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걸작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적으로 책 ‘걸작과 졸작 사이’는 걸작일까 졸작일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잘 모르겠다. 왜냐면 다 못 읽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보이는데 보지 못하는 책들의 리스트가 쌓여가고 있다. 앞에 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너무 좋아서 꼼꼼하게 씹어 삼키기 위해 진도를 나가지 못해 결국 덮어버린 책이 있는가 하면, 이게 분명 의미 있고 유익한 내용을 다룬 것이란 걸 알지만 이상하게 읽히지 않아 마냥 붙잡고 있다가 흘려 보낸 책들도 있다. 전자가 서평가의 독서법, 스파이와 배신자, 암컷들, 탄소로운 식탁 등이라면 후자는 세계 끝의 버섯, 권력과 진보, 에세이즘 등이다. 때로는 읽은 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기회가 된다면 잠시 내 손에서는 떠나있지만 머리에서는 떠나지 못하는 책들에 대해, 본 것과 보지 않은 것, 보고싶은 것과 보여주는 것, 혹은 그 반대 각각의 모서리들 사이 어드메를 헤매는 여정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굳이' 덧붙여보자면, 요 며칠 시끌벅적했던 몇 가지 연예인 열애설 또한 우리들이 보고 싶은 것과 보이는 것, 그리고 보여주는 것에 간격을 느끼게 했던 것 같다.  사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 지겹다 사귀든 말든’이 되어버린 것 같긴 하지만. 몇 주 전, 에스파 카리나의 열애설이 떴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이돌의 공개연애라는 건, 레스토랑의 요리사가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손을 씻지 않고 요리하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화장실을 간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아니면 생리적 현상이 아닌 옷 매무새 정리 같은 이유로 다녀온 것이라 손을 씻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내가 ‘봐버렸다’는 데 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서 계속 찝찝하고 불쾌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남선녀들이 한창 때 마주치면 서로 좋아질 수 있겠지, 만나고 싶겠지 (나라면 아닐텐데, 난 선녀였던 적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대충 넘긴다). 그런데 그걸 굳이? 알려줘야? 할까? 팬들이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할까? 외부에서는 이러한 팬덤의 반발에 대해 쉽게 '유사연애 감정'으로 치부해버리지만, 그런 단순한 감정 메커니즘은 아니다. 같은 목표에서 이탈해버린 동지에 대한 배신감이기도 하고, 보여준 것과 실체가 어긋나있다는 기만에서 비롯한 불신이기도 하며, 동시에 느낄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결론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을 보여주지 말고,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보여주는 것을 보고 싶어하며, 그것만을 내가 보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안온할지어다. BBC 니들이 몰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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