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왜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가?


 영화를 왜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가? 이 무슨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같은 말인가 싶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개인적으로는 꽤 무게있게 와닿았던 질문이었다. 드라마 뿐만 아니라 온갖 OTT에 유투브, 틱톡과 릴스 등 숏폼까지 바야흐로 콘텐츠 전성시대인데, 왜 우리가 영화에 시간을 내주어야 하는지, 영화가 다른 형식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하여 영화가 지난 세기 위기를 넘겨온 것처럼 작금의 위기 또한 무사히 넘겨 끝내 생존할 수 있을지까지를 아우르는 물음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걱정보다 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긴 한데) 얼마 전 비행기를 타며 본 영화 네 편이 마침 이와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왜 영화를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과 예시로서의 영화들 이야기.


첫 번째 답은 어쩌면 뻔할 수도 있다. 스크린의 크기나 사운드의 정교함 같은 하드웨어 환경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나 포함) '영화관용 영화'를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로 화려한 CG나 특수효과들이 있거나 와장창 쿠당탕탕 하는 액션씬들이 있는 영화들을 가리킨다.


<듄>은 전형적인 영화관용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이 처음 개봉했을 당시, '백인남성의 구원 서사'라는 후기에 지레 질려 볼 생각이 없었는데, 몇 년 뒤 파트2 개봉과 함께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내한을 하고, 시식만 좀 해볼까 싶어 유투브에 요약 영상을 보고.. 그렇게 정작 보고싶어진 시점에는 이미 모두 관에서 내려간 상황. 결국 뒷북의 뒷북으로 손바닥만한 기내 스크린으로 듄 (파트1) 을 본 소감은, 꼭 아이맥스로 봐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망망대해가 아닌 망망대사(沙) 같은 풍경, 미래같기도 과거같기도 한 오브제들, 거대한 적과 치열한 전투 장면은 큰 화면에서 봤을 때 그 쾌감이 온전했을 것이다. 사운드 역시 마찬가지. 듄 원작 덕후라던 한스 짐머는 과연 자신의 모든 역량을 토해내다시피 해서 완성했건만,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조금만 볼륨을 높여도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무료 기념품 이어폰을 통해서다. 스토리 역시 '백인남성의 구원 서사'라는 후기가 별달리 틀린 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재된 레이시즘과 미소지니는 아주 미묘한 선에서 가동한다. 당연하게도 원작자와 영화감독은 백인남성이다. 검은 복장의 베네 게세리트들을 보고, 비행기에서 내린 뒤 마침 마주한 UAE의 여성들을 보면서는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재밌긴 재밌었다. 이상하지만, 큰 화면에 내가 '압도'당하는 느낌이 없는 대신, 작은 화면을 내가 '통제'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문제가 생겨 도리어 인공지능을 억제하게 된 머나먼 미래 설정도 흥미로웠고, 그리하여 발생하게 된 베네 게세리트 집단의 신비로움과 압도감도 그 PC함과는 별개로 빠져들만했다. 주인공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한 모든 세팅을 유려하게 깔아두는 감독의 구성력이랄까 연출도 훌륭했다. 어쩌면 이런 환경에서도 재밌었는데, 더 몰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 속에서 후한 평점이 나왔을지도. 결론, 파트3이 나온다면 영화관에 가서 볼 것 같다. 아이맥스나 돌비는 워낙 예매 경쟁이 치열하니 적당히 큰 관 정도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답은 몰입도 차원이 아닐까. 누군가는 가끔 화장실에 가거나 핸드폰으로 시계를 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두어시간을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서 진득히 앉아 다른 것에 눈돌리거나 큰 움직임 없이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게다가 일시정지가 없기 때문에 매 순간 긴장하게 되고 이는 집중의 순도를 제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디버드>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관객인 나의 눈높이에서 이 영화는 전개 내내 공감성 수치의 연속이다. 때문에 몇 번이고 일시정지를 눌러야만 했다. 기내식이 나오는 시점엔 차라리 감사해하며 화면을 종료시켰다. 그러나 비행기라는 공간 특성상 어디 도망갈 곳이 없다. 고잉온과 턴오프 둘 중 하나만 있을 뿐이다. 다른 재미있는 도피 거리가 없기에 영화를 용감하게(!) 마주할 수 있었고, 쪼끔은 뿌듯한 마음으로 엔딩크레딧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완영(?)' 후 곱씹어보자니,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꼭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했는데, 그냥 저냥 순응하며 살아온 나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될 수 없기에 되고 싶었던 모습에 대한 대리만족이 있다기보단, 앞서 말했듯 도리어 공감성수치가 느껴질 정도였다. 친구와 싸우면서 하는 말이라든가, 집에 대해 거짓말 하는 부분이라든가, 프롬에 가는 길에서라든가... 그럼에도 좋았던 건 시얼샤 로넌의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 사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구남친을 말없이 꼬옥 안아주는 장면에서, 자신의 이름에 대해 당당하게 'given to me by me'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엄마에게 지금 이게 나의 best version이면? 이라고 대꾸하는 장면에서, 결국 뉴욕의 대학교에 입학한 뒤 술에 취해 쓰러지거나 그저 길거리를 거니는 순간에서 이상하리만치 삶에 대한 긍정이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오래 지켜볼 것도 없이, 엄마와 지리멸렬한 말다툼을 하다 불쑥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리는 첫 시퀀스에서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감당못할 여자애가, 낡고 지친 나의 가장 익사이팅하고 재미난 상상친구가 되어줄 것임을.


영화를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함께 본다'는 체험적 특성이다. 아주 가끔 혼자 영화관을 점령한 경험도 있기는 한데, 이를 예상하거나 의도한 적은 없다. 대체로 영화관은 나 외에 관객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줄 때도 많지만... 그래서 사실 이 답에 스스로도 확신은 없지만... 가끔 정말 운 좋게, 좋은 영화를 좋은 분위기의 관에서 보게 되면 그 기억이 두 배로 미화되곤 한다.


그러지 못해 아쉬웠던 건 '육사오'. 주인공은 우리나라 군인으로, 우연히 1등 당첨 로또를 주웠다가 놓친다. 이 로또는 북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에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다 결국 분배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설정인 데다 시나리오는 웃기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과하게 표출한다. 특히 중간 중간 나오는 화장실 유머는 브레이크가 없어 부담스럽다. 절로 팔짱을 끼고 흐린 눈을 한 채 화면을 보게 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엄청 깔깔대는 관객 사이에서 봤어도 이랬을까. 반대로, 가끔은 웃음이 풉 나오다가도 조용하다 못해 싸늘한 관 분위기에 머쓱해지곤 하는데, 이 영화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이없을 정도로 웃어버린 것도 사실이니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이야기했듯 영화관 관람의 본질은 관객이다. 함께 하는 경험은 감정을 증폭시키고, 나아가 공감으로 연결된다. 그렇다 해도 결국 영화를 보고 느끼는 바는 개개인이 다를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누구나 각자 영화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타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체험이다. 그러나 '증폭 효과' 때문에 독서와는 차별화된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읽고 이해하고 느끼게 된다. 독서모임의 형태로 이를 재차 소화하는 경험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겐 영화보단 책이 좀 더 내밀한 형식이고, 영화는 보다 사회적인 형식인 것 같다. 만드는 과정만 해도 책은 편집자나 디자이너 등이 참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작가 한 명이 쓰고 그 내용을 책임져야 한다면,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은가.


그리고 바로 이 '만드는 사람들'이 네 번째 이유가 된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영화를 너무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요 인물들의 욕망이 상호 충돌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내재적일 때도 표면적일 때도 있지만 어쨌건 늘 동력 그 자체가 된다. 영화 속 감독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그만큼 인정받고 싶어한다. 극 중 극의 주인공격인 여배우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본에도 (꽤 여러 번 이게 맞냐, 잘 모르겠다는 식의 대사들이 나온다)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고생했다,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떠날때까지 건조하리만치 쿨한 그들의 태도는 영화와 연기라는 자신의 업을 긍정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작자도, 조감독도, 심지어 제대로 연기 한 번 하지 못한 사냥꾼 역의 배우도 영화를 사랑하기에 각자의 역할에 책임을 다한다. 연기도 사랑도 검열도 그 모든 것도 내 것이 없고 내 맘대로 되는 것 없이 방해받는 와중에도 거미집과 극 중 극은 피날레를 향해 가고, 뒤죽박죽 엉망진창 같았던 과정 끝에 플랑 세캉스로 상징되는 결실은 마침내 모두의 합작으로 일구어낸다.


그러니, 이런 영화를 보면 일종의 매너나 예우 차원에서라도 영화관에서 봐야할 것 같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만 더'를 외치는 그의 돌아버린 눈을 스크린에서 마주하면, 대체 왜 저렇게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동시에 그걸 이해하고 싶어지고 그리하여 그와 같은 편이 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따금 김지운 감독의 메타적인 자조가 느껴지지만, 사르카즘이라기보단 회한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 인터뷰를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코로나 이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거미집은 그에 대한 최종 정답이라기보다, 지나쳐가는, '예비마킹'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극의 구조 자체도 어렵지 않고 메시지 또한 직관적인 편인데, 의외로 디테일에서 귀엽고 유쾌한 부분들이 넘치니, 일단 보고 나면 크게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열여덟시간 영화에 대한 고찰의 결론은? 딱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없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나는 늘 영화에는 열등감을 느꼈고, 좋아하는 감정마저 불명확했다. 영화인은커녕 시네필이라기에도 쑥스러운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영화 음악의 거장인 한스 짐머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기묘한 아이러니함을 느꼈다는 것 정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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