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의 진정한 맛을 찾아서
어렸을 때 부터 여름의 기억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뽀얀 콩국물에 더 하얀 면을 말아먹는 콩국수이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인데 나는 완전 호호호! 였다.
콩 : 맛있는거 + 국수 : 맛있는거 + 오이 : 맛있는거
이렇게 맛있는거 세 가지를 모은 음식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보니 콩국수는 생각보다 인기 음식이 아니었고 흔한 음식도 아니었다. 대학 생활 때는 먹었던 기억이 거의 없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그리워만 할 뿐 콩국수를 굳이 찾아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2018년 여름, 두 번째로 취업한 직장은 충무로였는데 어느 여름날 같이 일하던 동료가 칼국수나 먹으러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날이 운명의 그 날 이었다. 진양상가를 지나 허름한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칼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국물!
바로 콩국수 였다. 10년 만에 만난 콩국수가 너무 반가워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콩국수를 골랐다.
넓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긴 콩국물을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었는데 내가 그리워했던 바로 그 모든 추억과 기억을 소환하는 맛이었다. 아무 고명도 없이 국수만 말아져있는 콩국물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나는 무시무시한 소금파이다. 설탕 절대 사절!) 갓 담근 김치를 얹어 먹으면 국물의 고소함과 면의 고소함이 양쪽에서 나를 휘감는 어마어마한 풍족감이 느껴진다. 그 뒤로 다시 나의 콩국수 DNA가 깨어나 한 달에 두 세번 씩은 직장 동료들을 졸라 콩국수를 먹으러 갔다. 직장 동료들도 콩국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칼국수도 맛있는 집이라서 큰 반발은 없었다. 콩국수는 6월~9월까지만 판매를 하기에 가을, 겨울, 봄 다시 여름이 올 때 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울 따름이었다. 3년 후 충무로를 떠나서도 그 콩국수를 먹으러 다시 갈 만큼 내 인생 콩국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2024년 올 여름, 다시 한 번 나의 콩국수 사랑을 불태울 수 있는 지독한 더위가 찾아왔다.
이직 1년차, 이제 조금씩 여유를 찾고 주말에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콩국수 탐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요즘은 흰콩국수 보다는 검은콩 콩국수가 유행인지 여기저기 검색을 해봤지만 흰콩국수 맛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통의 강자 시청의 진주회관과 여의도의 진주집 흰콩국수로 유명한 곳인데, 콩국수 한 그릇 먹으러 굳이 멀리까지 혼자서 찾아가려니 흥이 나지 않았다. 특히나 요즘은 동생과 주말데이트를 즐기는 중인데 동생은 콩국수를 전혀 먹지 않기 때문에 굳이 가보자고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망향비빔국수를 찾게 되었다. 검은콩 콩국수 이지만 면도 맛있고 국물도 괜찮다는 후기들이 많았다. 간단한 오이고명과 함께 나온 콩국수를 한 입 떠먹으니 후기대로 꽤 고소한 맛도 많이 나고 간이 좋았다. 그러나 비빔국수의 면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면에는 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국물과 면이 따로노는 느낌이 들었다.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콩국수 만족도를 꽉 채우기엔 부족했다고 해야 할까, 너무 아쉬웠다.
망향비빔국수 화양점, 검은콩 콩국수, 9,000원 |
그래서 본격적으로 동생을 겨우겨우 설득해 바로 다음 날 1일 2콩국수를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아점으로 추억의 맛 충무로 칼국수의 콩국수를 먹고, 오후 늦게 시청역의 진주회관 콩국수를 먹는 것이다!
아침일찍 나서서 충무로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때보다 가벼웠다. 이른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아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충무로 칼국수는 허름한 가게가 있던 곳이 재개발 되면서 충무로 메인 거리로 새단장하여 이사했다. 훨씬 깔끔해지고 테이블 개수도 많아져있었다. 이전에 동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동생은 칼국수를, 나는 콩국수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먹는 콩국수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콩국물에 물론 소금간을 해서 먹으면 되지만, 면에 따로 간이 되어 있어야 적당히 간이 맞아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충무로 칼국수는 면의 간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면만 먹어도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계속 입에 남아서 씹으면 씹을 수록 더 맛있어진다. 동생도 콩국물을 한 숟가락 맛보더니 그래도 여기 콩국물이 그나마 먹을만 하다며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콩국수만큼 중요한 것이 김치인데 약간 짜고 매운 겉절이 김치가 콩국수와도 칼국수와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약간 가느다랗게 썰린 배추잎에 간이 골고루 배어있어 어느 부분을 먹어도 일정한 맛을 내는 것에서 사장님의 내공이 느껴진다.
부른 배를 소화시킬겸 영화도 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른 저녁즈음에 시청으로 향했다. 무려 만육천원이나 하는 가격에 놀랐지만 한 번은 꼭 먹어보고 싶었던 진주회관에 도착했다.
검색해보니 진주회관에서는 콩국수 외에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를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주 더웠던 주말이라 콩국수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호 낭패로다.. 결국 동생은 길 건너의 유림면에 가겠다고 했고, 나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꼭 콩국수를 먹고 싶어 진주회관에 남게 되었다. 결제는 선불이었고, 엄청 많은 종업원들이 아주 넓은 가게를 왔다갔다 하며 주문을 받고 결제를 하고 있었다. 콩국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면만 삶으면 되기에 음식은 매우 빨리 나왔다.
약간 살구빛을 띄는 국물에 면의 두께는 조금 두꺼웠는데 소금을 달라고 하여 간을 하고 드디어 맛을 보았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콩의 고소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콩국수는 특히 함께 먹는 김치의 맛도 중요한데 블로그에서 극찬하던 김치의 맛은 생각보다 간이 잘 배지 않아 밍밍한 맛이었다. 짠맛, 단맛이 잘 느껴지지 않고 조금 톡쏘는 맛이 있었다. 물론 기본은 하는 맛이었기 때문에 한 그릇 싹 비우기는 했지만 갑자기 혼자 먹게 되어 서운한 마음이 반영되었는지 가격과 명성에 비해 그저 그런 경험이었다.
서소문동, 진주회관, 콩국수, 16,000원 |
그리고 이번 주 여의도까지 치과진료를 받으러 가는 김에 동생이 먼저 그럼 진주집에 가보자고 아이디어를 주었다! 원래도 유명한 집이었지만 얼마 전 최화정의 유튜브에 소개된 것을 보고 꼭 가봐야 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치과에서 도보로 10분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흔한 여의도 음식점 상가의 지하에 있는 집이었다. 지하로 들어갔는데 너무 조용해서 잘못 온 줄 알았는데 가게 근처로 가니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블럭 두개를 따라서 줄이 늘어져 있었고 중간 중간 직원들이 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넓은 두 공간의 가게가 마주보고 있어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진주집은 닭칼국수, 비빔국수, 접시만두를 함께 팔고 있어 동생은 비빔국수를 주문했고 접시만두를 주문해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큰 쟁반에 모든 음식을 담아 내어 오셨고 서빙하기 전에 가위로 면을 시원하게 잘라 자리에 놓아주셨다. 치과 진료로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싹 풀리는 첫 입을 시작으로 국물과 면을 쭉쭉 들이켰다. 그런데 내 입맛이 이상한지 콩국물 끝맛에 약간 쓴맛이 느껴졌다. 동생에게 살짝 말했는데 맛을 보더니 역시 쓴맛이 난다고 했다. 이미 콩국물에 간이 되어 나와서 소금은 필요없었고, 면과의 합도 정말 좋았다. 비빔국수도 맛을 보았는데 새콤달콤매콤한 맛이 잘 어우러졌고 오이가 잘 절여져 아삭하고 꼬들한 맛이 좋았다. 김치는 완전히 보쌈김치였는데 무가 꼬들꼬들하고 달아 콩국수와도 만두와도 잘 어울렸다. 진주집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여의도의 또다른 명물 빠뜨릭스 와플을 만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인 점이다. 쫀득한 오리지날 벨지안 와플과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조화가 디저트로서 손색없다.
여의도동, 진주집, 냉콩국수, 15,000원 |
이렇게 올여름 1차 콩국수 탐방은 추억의 맛 vs 전통의 강자 에서 추억의 맛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콩국수를 검색하다보니 인스타그램에 임콩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용자가 콩국수 탐방기를 적어놓은 기록이 있어 그것을 앞으로 참고해 볼 예정이다. 서울 지역의 곳곳에 저마다의 사연과 내공을 가진 콩국수집이 운영되고 있어 하나하나 도전해 보는 재미가 가득할 것 같다.
어느덧 날씨가 선선해져 가을이, 또 곧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올 여름 마지막 콩국수 한 그릇 하러 조만간 충무로에 또 들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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