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를 이기는 가성비 꿀팁, 공짜 전자책으로 스릴러 읽기
오랜만의 뉴스레터이니 뭔가 대단히 재미있거나 뜻깊거나, 아무튼 무언가 흥미로운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고 안 굴러가는 머리를 굴려 봐도 역시나 평범하고 나태한 날들의 반복이었던 나의 일상에서 재미있는 소재가 나올 리 없고, 그리하여 이번 호도 역시 그간 읽은 추리/장르소설 중 괜찮았던 몇몇 소설의 소개로 끝내게 되었다. 겨울만큼 회사가 바쁘지도 않았는데 날이 너무 더워서 동네 도서관조차 왔다갔다 하기가 귀찮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인지라 대부분은 주말에 누워서 각종 사이버도서관을 뒤적이며 읽은 책들이고, 사실 올 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 때우기로 읽은 전자책이 꽤나 많은데 내 마음 속에서 B급, C급으로 멋대로 분류하여 후기를 쓸 가치도 없는(!) 책들은 빼고, 그래도 시간 내서 읽어보기 괜찮다 하는 정도의 소설들만 추려 보았다. 달력 상으로는 여름이 완전히 끝난 9월의 시작이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는 계속되고 있으니,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에어컨 키고 방에 누워서 공짜 전자책 읽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 붉은 박물관,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오래된 사건의 증거품을 보관하는 경찰 박물관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이미 시효가 지난 옛날 사건들의 진상을 오로지 증거품을 통해 추리한다는 컨셉의 시리즈이다. 증거품들이 말하는 진상은 때로는 소름끼치고 때로는 가슴 절절하다. 장편이 아닌 연작소설이기에 각 사건에 대한 설정이나 설명이 어렵지 않고, 설녀(일본의 민간 전설 중 하나로, 눈 내리는 산에 나타나서 미모로 등산객들을 홀린다는;; 전설의 존재)처럼 예쁘고 냉정하고 사회성 없는 히이로 사에코의 설정이 일본 남작가답게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자극적인 장치 없이 술술 읽히는 점도 장점이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괜찮은 편이고 무엇보다도 작은 증거품 몇 가지에서 그날의 진상을 담담하게 추리해 나가는 감정 없는 설녀캐릭터가 매력적이어서인지 일본에서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가 워낙 작은 부분에 착안하여 거기서부터 퍼즐을 풀어가는 스타일의 미스터리를 좋아해서 그런지 무난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추리소설,
- 레몬과 살인귀 / 구와가키 아유
예쁘고 서정적인 표지와는 정반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상당히 기묘했던 소설. 어린 시절 소년범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되고 가족이 뿔뿔이 해체되는 비극을 겪은 고바야시 미오는 아버지 살해범이 출소한 후 여동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 책 소개 페이지에서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았을 때는 소년범죄와 그로 인해 파탄난 한 가정의 비극, 복수 등을 연상하였으나 이야기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년범죄로 인해 망가진 삶을 살던 주인공이 여동생의 죽음에 숨겨진 진상을 찾아 나서는 줄거리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중간 즈음부터 이야기가 그 본색을 드러내며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가정부 이정은이 밤에 저택을 찾아오는 인터폰 화면이 보이는 순간 블랙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넘어가는 느낌과 비슷하다 하겠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현재가 교차되면서 마지막에 밝혀지는 서술 트릭의 반전 또한 기분 나쁠 정도로 교묘하다. 등장인물들의 정신상태가 하나같이 좀 이상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쉬이 공감이 어려운 점은 아쉽지만, 흔한 소년범죄나 복수 등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던 편견이 와장창 부서지는 과정 자체가 신선하다.
-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작열>, <절대정의> 등을 재미있게 읽은 바 있는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이다. 경기도 사이버도서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한창 자아가 형성되는 예민한 시기에 성폭력에 의해 파괴되고 억압된 여성의 내면, 그리고 제목인 <성모>가 암시하듯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 딸의 상처를 보듬고 지켜주려 하는 모성이 궁극적인 소설의 소재이자 결말의 반전으로 등장한다. 소년범죄와 성범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함과 동시에 추리소설로서는 절묘한 서술트릭을 통해 감춘 2가지의 큰 반전이 돋보인다. 딸을 지켜주기 위하여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딸이 저지르는 범죄를 은폐하는 모성은 과연 성모일까 왜곡된 모성일까. 머리로는 물론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열린 결말처럼 형사가 찾아오기 직전이라는 암시와 함께 끝난 소설 속 결말처럼 결국은 꼬리가 잡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알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의 잘못을 모른 척 하고 싶어진다.
- 행복배틀 / 주영하
어느 주말 밤 아무 생각 없이 지역구 사이버도서관을 훑다가, 저자나 책에 대해 아무 사전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행복배틀>이라는 제목이 너무 시강(시선강탈)이어서 빌려 보게 되었다. SNS의 보여주기식 행복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질투와 진상, 부자 동네 학부모들 사이에서의 미묘한 서열과 기싸움 등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입맛 당길 수밖에 없는 소재들의 범벅이니 그야말로K-스릴러라 하겠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과 인물 투성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자가 기성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두세 가지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것이 전부인 듯 싶다) 앉은, 아니 누운 자리에서 쭉쭉 잘 읽힌다. 유달리 덥고 지겨운 열대야로 힘든 주말 밤에 누워서 읽기 좋은 스릴러다.
그러나 SNS에서 행복한 척하는 ‘맘들’이 실은 속물덩어리에 다 꾸며진 행복이라는 식의 자극적이고 수준 낮은 서사에 머무르는 소설은 결코 아니며, 메인 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학창시절 숨겨진 상처들이 드러나면서 오로지 입시가 우선 자녀를 독립된 개체가 아닌 자신의 입맛대로 조종하는 인형마냥 취급하는 일부 학부모들과 자신의 자녀의 입시를 위해 가정 내 폭력, 성폭력마저 입막음되는 안타까운 현실 또한 보여준다. 다만 행복배틀을 겨루는 맘들이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의 ‘실은 월세살이이며 뒤에서는 남편이 바람피우고 폭력을 쓴다’는 류의 설정이나 몇몇 상황 설정의 부자연스러움, 예를 들어 주인공과 친구가 도대체 경비가 삼엄한 고급 아파트 단지와 그 주차장에 어떻게 제집 드나들 듯 하는지, 쌩판 남인 주인공에게 그 고급 아파트의 이너 서클인 맘들이 그리 쉽게 남의 얘기들을 알려주고 만남을 갖는지, 주인공이 친엄마를 공격한 후에는 대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등등(그 동네는 경찰도 없나?)이 거슬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나는 서울 부자 동네의 아파트에 입주할 일도 없고 맘이 될 일도 없으니 ‘부자 동네의 맘카페’가 실재로 그만큼의 권력 싸움과 영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또한 부유한 사람들이 SNS에 전시하는 행복이 가짜가 많은지도 잘 모르겠다. SNS에 행복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다 보여주기식이라기보단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그렇다 한들 솔직히 나 역시 <행복배틀>에서 돌려까는 SNS상의 허세와 사랑받는 척 하는 컨셉 배틀 등이 오글거리고 싫은 건 변함 없긴 하지만.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