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무언가를 찾아 헤맸던 366일
2024년 참 길었던 것 같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꼭 작년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특히 12월은 한달이 아니라 한 10년쯤 산 것 같은 가속노화의 매일, 아니 매시간을 버텨내고 있다. 연초에 썼던 나의 인생 서랍 속 간식들을 보는데, 그야말로 새삼스러웠다. 그랬었지, 그러고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해냈구나(?)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연말정산을 해봐야겠다.
[영화]
올해 영화관에 자주 가진 않았어도 영화를 적지 않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확인해보니 영화관에선 고작 여섯편을 봤다. 월에 한 번은 보려는 게 목표였는데, 그 반이라니 어쩐지 충격적이다. 모든 걸 제쳐 놓고 보고 싶은 작품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의욕이나 기력이 많이 소모된 것 같다.
그래도 파묘는 기대만큼 좋았다. 그래도 연초의 기대 속에선 천만명의 영화라곤 생각 못했는데 무려 올해 우리나라 영화 흥행 1위로 남았다. 데드풀과 울버린 역시 기대를 후회로 남지 않게 해줬다. 덕후의 덕심을 잘 채워준 재밌고 알찬 작품이었다. 매드맥스 프리퀄인 퓨리오사:매드맥스 사가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보다는 좀 아쉬웠던 것 같다. 이미 '아는맛'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프리퀄이란 것이 대체로 꽉 막힌(?) 엔딩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가여운 것들은 앞서 본 사람들의 평을 보고 뒷걸음질 쳐서 앞으로도 안 볼 것 같고, 존윅의 스핀오프는 아직 미개봉이다. 대신 듄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베테랑2가 오랜만에 즐거움을 주었다. 가장 최근에 보았던 하얼빈은 수작일수는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특별히 좋은 점을 꼽으라고 하면 말할 것이 없는 플랫한 느낌이었다.
존오브인터레스트나 추락의해부는 놓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는 영화.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돌고 돌아 언젠가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때는 놓치지 말아야지. 바튼 아카데미는 좋다고 하기엔 너무 나이브한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책]
많이 읽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하였으나, 안 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양적인 면에서도 깊이의 면에서도 모두 전년 대비 급감(!)한 한 해였다.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그대로 반납하는 임보를 가장 많이 한 해인 것 같기도 하다. 나온 지 꽤 오래 된 추리소설들을 찾아 읽었고, 에세이같기도 자기계발같기도 한 책들 (뾰족하게 기억남진 않는) 을 흘려보내듯 읽은 것 같다. 책을 보면서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들이 늘었고, 삐딱하게 마음 속으로 대꾸하는 시간들을 쌓아갔다. 그 와중에도 김영란의 판결과 정의 같은 책을 보며 세상을 향한 시선의 채도가 높아졌고, 수능 해킹 같은 책을 보면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으니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파민 중독, 망가진 전두엽 등등의 문제로 몇 페이지를 넘기다 포기한 나의 눈부신 친구, 이토록 사소한 것들, 백의 그림자, 쇼코의 미소, 눈부신 안부, 내이름을 빨강,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내년에는 꼬옥, 부디 꼬옥 읽을 수 있어야 할텐데. 언제나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올해 빼놓을 수 없는 책 관련 이슈가 있다면 역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일 것이다! '그 날' 전까지만 해도 올해 최고의 핫이슈였을텐데... 쑥스럽지만 이번 기회에 한강 작가의 책을 몇 권 샀다. 사놓고 보니 책장 한 켠에 아주 아주 오래된 한강 작가의 책들이 몇 권 꽂혀있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새로 사지 않고 새로 빌리지 않아도 여전히 읽을 책은 많은데, 새로운 책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에도 쏟아지고 있으니 영원히 나는 책의 뒤꽁무니만 쫓아갈 운명인 것 같다.
[전시]
작은 전시까지 포함하면 올해 딱 열 개의 전시를 봤다. 딱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의 최애 작가 반 고흐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일 것이다. 사실 가장 좋았다기엔 사람에 치이고 낑긴 몸의 기억이 강렬한 데다, 많이들 말하는 것처럼 대표작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애 작가를 미디어아트 어쩌고가 아니라 '작품'으로 만나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연초 기대했던 두 개의 전시는 몸을 바지런히 놀린 끝에 모두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 전시는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판화가 많아 전시 전체의 리듬감은 아쉬운 편이었다. <미래 긍정 : 노먼포스터, 포스터+파트너스>는 경쾌하고 재미난 경험이었다. 내가 갔을 때가 전시 막판이라 유독 사람이 많은 건 줄 알았는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올 한 해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전시였다고 한다.
그냥 계시를 받듯 충동적으로 가서 보았던 페이스 갤러리에서의 <조응 :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는 단 몇 개의 작품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인스타그래머블하지 않나 싶었지만 실제 더 많은 작품에서는 친근감이 느껴졌던 <이경준 사진전 : 원스텝어웨이> 도 좋은 경험이었다. 새로운 전시공간을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그 외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의 인왕제색도를 본 것과 특별전을 통해 선림원 터 금동보살입상을 만난 것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외 빅토르 바자렐리,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내촌목공소 나무의 시간 등도 인상깊고 흥미로웠다.
[음악]
최신효과일 수도 있지만, 올해 많이 들었던 앨범은 태연의 미니 6집 letter to myself. 체감상으로는 전작들에 비해 성적이 좀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여섯 곡 모두 너무 좋아서 정말 풀 버전을 매일같이 돌려듣고 있다. 태연의 몇 몇 곡을 잘 듣긴 했지만, 이렇게 앨범 자체로 잘 들은 건 정규 1집 이후로 오랜만인듯 하다.
정작 궁금하고 기다렸던 레드벨벳 10주년이나 데이식스의 앨범은 생각만큼 많이 듣진 않았다. 대신 다양한 노래를 많이 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키스오브라이프나 케플러, 엔하이픈이나 투어스, 엔믹스 등의 타이틀도 아닌 수록곡들을 들으며 무궁무진한 Kpop의 세계에 잠길 수 있었다.
노래라는 건 그 시간이 짧아서 명확하게 체감할 수는 없지만, 시간의 미학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는 빨기 감기가 가능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은 공간성이 다른 축을 이루기 때문에, 음악이야말로 오롯이 시간만으로 구축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여유가 없을 수록 삶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얘기를 거창하게 하고 있냐면, 클래식 음악을 못 들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다. 끝!
[아티스트]
고민을 하다가, 사실 연말 시상식에서 온갖 대상을 휩쓸만한 에스파에 대한 얘기를 음악에서 언급 못한 것 같아서 올해의 아티스트로. 사실 에스파가 처음 데뷔했을 당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던 나지만, 슈퍼노바와 아마겟돈, 위플래시의 3연속 홈런을 보고 나서는 그 당시의 나에게 의문을 던지고 싶다. 물론 그 모든 성공이 여타 아티스트를 훌쩍 뛰어넘었다거나 에스파의 역량이 가장 뛰어나다거나 SM의 기획력과 노하우가 최고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 트렌드를 탄다는 것은 당위성을 제외한 우연적 운명이 팔할쯤 된다고 보는데 (수치적 의미가 아니라 어감이 좋아서 써봄), 올해의 에스파는 여러모로 바람을 탔다고밖에. 어찌되었건 벅뚜벅뚜 걸어나갈 에스파의 내일이 궁금해진다!
[도전과 성과]
이건 정말 정말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새롭게 시작한 도전이 몇 가지 있고 성취는 없지만 꾸준히 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당장의 성과를 감히 꿈꾸긴 어렵지만, 경제학원론 성적이 좋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매몰비용이나 기회비용에 대해 골몰하게 하진 말아주길 스스로에게 그리고 운명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추가로, 2022년부터 개인적으로 소소하더라도 매해 자격증 하나씩 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올해도 무사히 하나를 추가할 수 있었다. ADsP라고, 진짜 하나도 모르겠는 문장들을 읽어가며 열심히 의미를 더듬어갔던 보람있는 공부였다.
[공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와 문화비축기지, 아트책보고 등 새로운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약간의 두려움과 게으름을 버리면 대체로 트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일단 나서면, 그 순간부터 후회는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이 경험의 신비로운 지점인 것 같다. 여행하는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겠지. 다만 아쉬운 것은 대체로 이러한 공간들이 서울에 몰려있다는 것이다. 혹은 서울에서만 접근성이 좋다는 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의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나 포함.
[여행]
올해 드디어! 코로나 이후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UAE와 홋카이도, 그리고 제주도. 공항을 걸으며, 시차를 느끼며, 다른 언어를 들으며, 어디선가 본듯하지만 낯선, 새롭지만 이미 좋아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보며, 돈 버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라고까지 적었는데 큰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보았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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