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픈 당신에게
하루에도 몇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감정의 기복과는 별개로 일상은 대체로 평온하다. 세상은 시끄럽다고들 하지만 그 세상의 다양한 풍파들이 우리에게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단조롭고 심심한 것이 보통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일상의 단조로움과 안전함을 담보로 과감하고 위험한 상상을 만끽(?)하기도 한다.(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엘리베이터에 갇힌다거나 터널이 붕괴된다거나 하는 것은 물론 별별 상상을 다 하지만 차마 공개적으로는 적지 못하겠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일은 물론이고 안 좋은 일마저.
줌파 라히리의 단편집 “축복 받은 집”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무언가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긴장감이 차오르지만 결국 달라진 것 없는 못내 쓸쓸한 일상. 다른 리뷰를 보면 대체로 이를 소통의 부재로 인한 슬픔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요한 걸 말하고 싶지만 듣는 이가 없고, 아껴둔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전할 이가 없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날 곳이 없는, 그래서 느끼는 일상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서. 그렇다 소통의 부재,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안의 어떤 부분은 나만 알 수밖에 없기에 사는 건 외롭고 쓸쓸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삶에 무언가 다른 자극,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지만 (소통의 부재 때문이든 다른 것 때문이든)그 기대가 모두 허물어지고 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픈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질병 통역사’에서 카파시 씨는 미국에서 인도로 여행 온 다스 부부에게 관광지를 안내한다. 인도인이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라 인도어를 못하는 것은 물론 모든 생활방식마저 미국식인 다스 부부에게 카파시 씨는 처음에 거리감을 느낀다. 부부와 의례적인 대화만을 나누다 직업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갈 무렵, 그가 평일 중에는 병원에서 환자의 통증을 의사에게 영어로 통역해 주는 일을 한다고 하자 다스 부인은 ‘낭만적’이라는 말을 한다. 예전부터 통역사를 꿈꿨던 그에게 고작 병원에서 질병을 통역하는 일은 실패자처럼 여겨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스 부인이 그 일에 대해 ‘낭만적’이라는 말을 하며 관심을 보이자 그는 우쭐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와 아내 사이에서 오랜 시간 느끼지 못했던 이성 간의 호감을 품게 된다. 그는 다스 부인에게 그가 만난 여러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척추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환자, 모반에서 털이 나기 시작한 환자 이야기 등등, 다스 부인은 분명 깊은 관심을 보이는 듯했고 그의 주소를 묻기까지 했다. 어쩌면 다스 부인도 그처럼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감을 내보이며 둘의 사이가 가까워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되지만 이 모든 건 그의 착각이었음이 이내 드러난다. 사실 다스 부인은 카파시 씨에게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 질병을 통역한다는 그의 일에 관심이 있었다. 다스 부부의 둘째 아이는 부인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고 부인은 그에게 이 비밀을 털어 놓으면 자신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지 않을까, 질병통역사인 그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간이나마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그의 주소가 적힌 쪽지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카파시 씨 혼자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다른 단편도 비슷하다. ‘일시적인 문제’에서 사산으로 아이를 잃고난 뒤 사이가 소원해진 쇼바와 슈쿠마 부부는 전기공사 로 인해 오후 8시부터 1시간씩 닷새 간의 단전을 겪는다. 단전을 계기로 두 사람은 오랜 만에 양초를 켜놓고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제껏 말하지 않은 비밀을 고백하기로 한다. 그렇게 나흘 간 비밀을 고백하며 둘의 사이가 회복되는 듯하지만 예상보다 일찍 공사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쇼바는 슈쿠마 몰래 따로 혼자 살 집을 구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상처를 받은 슈쿠마는 그동안 쇼바를 위해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어둠속에서 함께 우는 것으로 끝이난다.(어둠 속에서 함께 우는 것을 두고 해석이 갈리는 듯하지만 나는 더이상 둘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은 쇼바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를 마음껏 원망할 수 있도록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더이상 원망하지 못하게끔 어디로 그 마음을 보내야 할지 모르게끔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알고 난 뒤 그들은 더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섹시’에서도 그렇다. 미랜더는 아내가 있는 남자 데브와의 첫만남을 특별히 여긴다. 데브가 한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옷을 고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미랜더가 고른 옷 역시 (긴 다리를 보는 즐거움을 앗아간다며)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심한다. 데브와 헤어지기로. 하지만 앞으로 한두 번쯤은 더 만나겠지, 만나면 이러한 만남은 온당치 않은 일이라고 말해야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기로 한 일요일은 날씨 때문에 그 다음주 일요일은 미랜더에게 약속이 있어 만나지 못한다. 결국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한 채, 미랜더가 애써 결심한 끝맺음을 맺기도 전에 둘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축복 받은 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이렇다. 일탈을 꿈꾸지만 혼자만의 동상이몽으로 끝나고 상황이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변화를 결심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의 아주 사소하고 소박한, 결론조차 없는 사건을 통해 무심하고 때론 잔인한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단편들을 읽다 보면 선득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따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없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런 인생을 버티고 견디다 보면 누군가는 당신을 이해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보통의 삶도 지나고 보면 아주 놀랍고 근사한 것이라고. 그 뻔한 메시지를 건조하면서도 세심한 필치로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게 전해 준다. 그래서 마지막 단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의 이 문장들을 적지 않을 수 없다.(너무 많이 옮겼지만 그래도 읽어 주길 바란다.)
어떤 날은 그녀가 잠에 떨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곁에 앉아 있으면서 이 노인이 지구상에서 보낸 오랜 세월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곤 했다. 때로는 그녀가 태어난 1866년의 세상을 그려보려 했다. …… 이런 간단한 행위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고 방세 8달러 말고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 가기 전 마지막 금요일에 나는 크로프트 부인에게 1달러 짜리 지폐를 여덟 장 넣은 봉투를 건네고 내 여행 가방을 아래층에 내려 놓은 다음 이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알렸다. 그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탁자에 기대어 세워진 지팡이를 건네달라고 요구했다. 문까지 가서 내가 나가면 문을 잠그려는 것이었다. …… 감정의 표출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숙인일 뿐이었다. 약간의 돈을 내고 여섯 주 동안 자신의 집을 들락날락하던 사람일 뿐이었던 것이다. 한 세기에 비하면 육 주는 시간이랄 것도 없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그 여름의 여섯 주는 나의 과거에 끼어든 오래 전의 막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 그녀는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다. 오래오래 혼자 살다가 영원히 떠난 것이다.
아들은 크로프트 부인의 나이가 아니라 내가 방세로 낸 돈이 그토록 적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놀라움을 표한다. 아들에게는 그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인 것이다. 달에 깃발을 꽂았다는 게 1866년에 태어난 여자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이것이 어쩌면 소설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달관한 듯한 태도와 현학적인 어투로 인생은 원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고, 삶이란 원래 우연의 예술이라고 쉽게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쉬운 길을 두고 우리의 일상을 지긋이 들여다 보는 것, 조금 우스운 비약이지만 입자와 파동 사이를 오가는 전자의 움직임을 두고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서 철학적 통찰을 얻는 것처럼 사소함으로부터 인생을 조망하게 되는 것이 소설이 지닌 큰 힘이고 ‘축복 받은 집’은 그러한 소설의 힘을 아주 잘 느끼게 해 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이고 “축복받은 집” 또한 모든 단편에 인도계 미국인 또는 인도인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이민자 문학’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인도인의 문화와 풍습이 소개된다는 것 빼고는 굉장히 미국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의외였다. 화가로 비유하자면 에드워드 호퍼, 작가로 비유하자면 레이먼드 카버처럼. 에드워드 호퍼는 아마 표지의 분위기 때문에, 레이먼드 카버는 그의 글이 이야깃 거리도 되지 못할 너무나 일상적이고 단순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줌파 라히리의 이후 행로가 이방인과 경계인으로서의 삶이란 무엇일지 더 곱씹게 하는데, 이는 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후에 그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탈리아로 이주,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벵골어와 영어, 영어와 이탈리아어 사이에서 느낀 낯선 긴장과 균열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글로 썼을지 그리고 새롭게 배운 이탈리아어로 쓴 글은 어떤 여운을 남길지 그의 다른 글들을 한껏 음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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