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염인의 향수 탐방기

 사실 향수를 잘 알지는 못한다. 예민하게 탑, 미들, 베이스 각각 무슨 향인지 잡아내거나, 브랜드별로 어떤 향수인지 구분하고 알아내지도 못하고, 향 설명을 풍성하게 잘 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약간의 비염도 있다. 다만 그 무엇보다 '좋은 향'에 집착한 지 어언 몇 년, 이런 저런 향 제품들에 알짱거려보면서 현재까지의 기준으로 내 취향인 것들이 생겨났다. 너무 단 것은 부담스럽고 지나치게 우디하고 묵직한 것도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청량한 느낌은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가볍기보다는 독특한 포인트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렇게 내가 시도해보고 좋.느를 가졌던 것들에 대해 기록해본다.



1. 프레쉬 헤스페리데스 자몽향

이제는 철수해버린 비운의 브랜드 프레쉬의 자몽향 향수. 지속력이 똥망이긴 하지만 뿌리는 순간 그 상큼하고 상쾌한 향이 정말 좋았다. 이 향은 너무 좋은데 너무 잔잔하기도 하고 오래 가지도 않아 많이 뿌려야 하고 근데 또 용량 대비 가격은 부담스러우니, 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더바디샵의 핑크그레이프후룻도 써봤는데, 언뜻 비슷한가 싶다가도 또 전혀 다른 탑노트나 잔향이었다. 그래서 결국 프레쉬를 찾게 되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을 때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난다.


2. 불가리 옴니아 아메시스트

불가리 특유의 독특한 향수병 중 보라색이다. 한때 '크레파스 향'에 한껏 빠졌는데, 이것이 원류였다. 워낙 저렴하게 비슷한 향들이 많이 쏟아지다보니 언뜻 이것도 싼티(...)가 나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코가 그리워하는 엣지 있는 향. 그리하여 잊을 만 하면 뿌리게 되는 향이기도 하다.


3. 클린 웜코튼/소프트런드리

솔직히 말하자면 두 가지 각각이 어떤 향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향알못이라..미안합니다..) 다만 둘 다 혹은 둘 중에 하나는 정말 집착할 정도로 좋아했어서, 올리브영에 가면 시향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 범벅으로 만들곤 했었다. 그러다가 회사에 정말 안 좋아하던 사람이 이걸 열심히 뿌리고 다닌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는 가까이 하지 않고 있다. 쩝. 그래요, 향에도 다 서사가 있는 겁니다.


4. 바이레도 블랑쉬

사실 이건 순수하게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냥 유명해서 트라이해본 쪽에 가깝긴 하다. 사람들의 설명대로 관념적 '하얀 셔츠'의 향 그 자체다. 거기에 아주 약간의 느끼함이 더해져서, 살짝 부담스러운 향이긴 하다. 여름에 청순청량 느낌으로 시도한다면 오히려 비추. 약간의 묵직함이 있어서인지 겨울 코트와 잘 어울린달까. 이 또한 수많은 아류의 향이 나왔지만, '역시 원조는 원조'라고 생각하게 된다.


5. 구찌 블룸

구찌인데 + 생각보다 비싸지 않고 + 보틀이 너무 예뻐서 블라인드로 들였는데, 정말 내 취향의 '크레파스 향'이었다. 불가리보다 좀 더 고급진 느낌이랄까. 보틀만큼이나 화사하면서 예쁜 느낌의 향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많이 뿌리면 겨울이라도 순간 역해질 정도여서 이 양 조절이 굉장히 미묘하다.


6. 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레이지 선데이 모닝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샘플 세트로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는데, 모든 향이 다 독특하면서 좋았다. 다만 데일리로 무난하게(?) 내 취향껏 쓸 수 있는 건 레이지 선데이 모닝이었다. 약간 찌르는 듯한? 매캐한?느낌도 있는 향이고, 지속력도 제법 오래 가는 편이라, 호불호가 무척 갈릴 것 같은 향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관념적 여름뮤트-가을뮤트 톤 스러운 느낌을 살리고 싶을 때 이 향을 시도하는 편이다. 


7. 마크제이콥스 레인

한때 단종되었다가 재출시 되었을 때 무지성으로 들였는데 정말 정말 만족도가 높아서 몇 번 더 샀을 정도다. 호불호가 딱히 갈리지 않을 것 같은 정말 무난한 데일리템이다. 너무 달지도 너무 우디하지도 너무 플라워리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촉촉한 물향' 같은 느낌이어서 잘 썼다. 심지어 용량 대비 가격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짐승용량) 열심히 열심히 뿌리고 다녔더랬다. 그런데 다시 찾아보니 단종되고 비슷한 다른 제품이 나왔나보다.


8. 에르메스 운자르뎅 수르닐

나에게도 무려 '에르메스'가 있다 <-를 실현해준 향수. 면세에서 사면 이름값에 비해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다. 그 중에서도 운자르뎅 수르닐은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 정말 촉촉한 '여름'향수다. 레인보다 살짝 달콤한 느낌이 있나 싶은데, 과일향 혹은 인공적인 단향은 없어서 머리 아프지도 않고 좋다. 이 또한 호불호가 덜 갈릴 것 같아서 한 번쯤 시향해보길 추천! 왜 굳이?냐고 묻는다면 '에르메스'라고 답해볼게... (허영심 그득)


9. 메모 인레

메모 인레라는 브랜드/제품명이나 언뜻 패키징을 보면 굉장히 중후한 머시기가 아닐까 싶어 별 관심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복숭아 향 중에 최고'라고 추천해준 걸 보고 일단 들여보았다. 그리고 후회는 1도 없다. 근데 이전의 추천대로 늘 복숭아 향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찾아보니 금목서 향이란다. 역시... 난 금목서 향의 쳐돌이다. 뭔지 몰라도 내 취향을 저격하는 포인트가 있다. 소녀스럽게 여리면서도 지속력이 없진 않고 너무 뽀용뽀용 이런 느낌보다는 은은하면서도 세련된 무드랄까. 무엇보다 여러 향수를 뿌리면서도 주변인에게 향 좋다는 평을 들은 몇 안 되는 향수 중 하나여서 더 특별히 좋아하고 있다.


10. 에어린 이캇자스민

한때 트와이스(...)가 에어린의 향수를 많이 쓴다는 얘길 접하고 엄청 찾아다녔는데, 에스티로더의 하위브랜드(?)여서인지 정말 찾기 쉽지 않았다. 우연히 작은 사이즈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라일락패스와 고민하다가 이캇자스민을 찜했는데 기대보다 더 좋았다. 구찌 블룸과 메모 인레를 섞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투박하겠지... 약간의 크레파스향과 허브향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느낌인 데다 지나치게 알콜스러운 느낌도 없어서 좋다. 다만 가격이 좀 있어서 아껴쓰고 있었는데, 실수로 좀 쎄게 뿌리고 간 날(..) 주변인에게 향 좋다는 평을 들어서 이 또한 특별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11. 헉슬리 모로칸 가드너

싱그러운 풀 향을 느끼고 싶다면 강추하는 향. 유투브를 보다가 알게 되어 올리브영 갈 때마다 시향하는 나만의(?) 힐링템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한 향이어서 그런지 오래 남는 느낌은 없다. 엄청 입체적이거나 디테일하다기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살짝 투박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고급진 터치도 가미되어 있다고 느꼈다. 진심 엄지손가락만한 찌끄만 병에 몇 만원이어서 흠 좀 싶다가도 이 편안함이 좋아 결국 구매까지 이어졌다. 할인 들어가면 쟁여두고 싶은 템. 사실 헉슬리의 포트브레스나 선셋포그도 독특하면서 운치있는 향이라 굉장히 좋아하는데, 가끔 찌르는 듯한 머리 아픈 느낌이 있어서 데일리로 무난하게 손이 가는 건 모로칸 가드너인 것 같다.


12. 대니맥켄지/다니엘트루스 밤쉘

시향지 마케팅의 원조(?). 백화점에서 나눠주는 시향지에 나도 몰래 킁킁대며 매장으로 따라간 적이 있다. '승무원 향수'로도 유명했다. 상쾌한 비누향이랄까 관념적 샴푸향이랄까. 향수라기보다 오일이어서 손목이나 귀 뒤 같은 곳에 찍어바르는데, 의외로 향이 오래간다. 여기저기 퍼져나간다는 건 아니지만 몸에 남아있어서 아침에 바른 게 오후 늦게 순간 훅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향이 부담스럽거나 변질된 느낌이 없어서 많이 좋아했는데, 내부 싸움이 있었는지 브랜드가 갈라지고 서로 저격하고 그러면서 향이 좀 달라진 것 같아서 요즘은 딱히 기웃대지 않고 있다.


13. 비비앙 월넛크릭그린

또 한 번 시향지에 이끌렸던 베스트 향. 약간 인공적인데 화하지 않으면서 코가 뚫리는 청량 느낌이어서 섬유향수로 들여놓고 옷장에 수시로 뿌려주고 있는데 정말 좋다. 개인 취향으로 비비앙도 향을 잘 뽑는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한때 로라 메르시에의 엠버 바닐라 크림과 유사하다는 말에 솔깃해 비비앙의 엠버 바닐라 앤 데이지를 들였고 포근폭닥한 느낌을 살려 니트에 자주 뿌리곤 했다. 다만 묵직한 단 향을 참아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아 손이 자주 가진 않는다는 게 함정. 그러나 월넛크릭그린은 계절과 때를 가리지 않고 좋으니 강추입니다.


14. 딥디크 도손

고체 향수란 것이 궁금하여 시도해보았는데, 비누같은 재질을 손에 문질문질해서 오일처럼 몸 이곳저곳에 찍어 바르곤 했다. 과연 유명세답다 싶게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이라 이 또한 겨울에 자주 썼는데, 여름이 되면 지나치게 묵직하게 느껴져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쩐지 나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서 요새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것 같다.


15. 아쿠아 디 파르마

이름부터 패키지 디자인에서 향까지 정말 일관적인 느낌(p)이다. 다만 향알못 입장에서는 향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서 음 대충 시트러스하면서 아쿠아스러우면서 시원하고 바다같고 지중해같고 그렇네 하고 뭉뚱그려 생각하게 된달까. 결국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디스커버리 세트로 사서 그때그때 느낌대로 쓰고 있는데, 다 무난한 편인 것 같다. 가끔 아빠스킨냄새가 쎄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냥 유니섹스다 생각하고 쓰면 또 나름 어른스러운 느낌도 있고 그렇다.


16. 시로 은방울꽃(스즈란)

언제부턴가 스물스물 바이럴되어 '일본 가면 꼭 사와야 하는 템' 중 하나로 꼽히던 시로. 추구미 노재팬으로 애써 흐린눈 하고 있다가 성수에 들어왔다고 하여 알짱거려봤다. 시향해보니 의외로 비슷비슷한 계열이 아니고 정말 천차만별의 향들의 라인업이 있어 놀랐다. 어떤 건 정말 취향에서 저 멀리-심지어 이딴 거 누가 뿌리고 다녀 싶을 정도-였는데, 베스트 중 두어가지는 정말 취향이었다. 그리고 한국 특별향이래서 마지막으로 시도해본 은방울꽃에서 이전 취향이었던 향들은 싸그리 잊었다. 이것이 바로 제 취향이군요! 가격도 많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브랜드.


17. 조러브스 망고타이라임

냄새만으로 암환자도 잡아낸다는 조말론이 성공적으로 엑싯(!) 하고 독립해서 차린 브랜드. 과연 향이 정말 잔잔바리에 일명 현관컷/3초컷일 만큼 지속력 게 나쁘지도 않고 아예 없을 정도(..)지만, 그 와중에 기가막히게 미묘하게 좋은 향들을 선보인다. 망고타이라임도 이름만 보고 이게 대체 뭐야 싶었지만 시향해보았을 때 오 이래서 유명하구나 이래서 인기있구나 싶었다. 같은 브랜드의 포멜로도 워낙 인기가 많던데 개인적으로는 망고 쪽이 좀 더 취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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