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하기 - 뮤지엄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꿈꿔온 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최애 예술가 반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를 포함한 베네룩스 3국과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의 그림을 무지 많이 만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 간 것. 이 여행의 키워드는 오로지 하나, 미술관. 여행 다녀온 지 한 달 남짓인데 벌써 기억이 휘발되는 것 같아, 다녀왔던 미술관들을 잊지 않기 위해 간단하게나마 기록해둔다.


1. 반고흐 미술관

이름부터 '반고흐 미술관'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자리하고 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표를 구하긴 어렵기 때문에 꼭 예약해야 한다. 네덜란드에는 뮤지엄패스라는 게 있어서, 75유로를 내면 최소 다섯개 이상의 뮤지엄(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구매하려면 유럽에 주소지가 있어야해서 무조건 현장 구매를 해야 한다. 반고흐 미술관 예약할 때는 일단 뮤지엄패스가 있다고 체크하면 돈을 내지 않고 예약하고 미술관에 가서 뮤지엄패스를 구매하면서 동시에 예매확인을 받을 수 있다. 블로그 후기를 찾아보긴 했지만 확신이 없어서 미술관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정말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줘서 감동받았다. 분명 매일 매타임 인원수를 제한해서 예약받는 걸텐데 오픈런을 했음에도 사람이 많긴 했다. 오로지 반고흐의 그림만 볼 수 있으니 그의 덕후라면 꼭 가봐야 한다. 사람이 많아도 공간 자체가 깔끔하고 쾌적해서 좋았다.


2. rijksmuseu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 '국립'답게 정말 크고 작품 수가 많고 볼 것이 많다. 건물 자체부터 고풍스러운 느낌인데, 그렇다고 예전부터 있던 궁을 활용해 미술관으로 쓰게 된 건 아니고 건축가가 그런 컨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부에 들어가면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이 있다. 워낙 크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찬찬히 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간에 쫓겨 한 층은 아예 보지도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중앙홀에 주요 작품들을 모아둔 곳은 지루할 정도로 꼼꼼히 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사실 네덜란드의 '국민화가'는 고흐보단 렘브란트라고 한다. 그럴 만 한 게 고흐는 프랑스에서의 작품 활동이 더 강렬한 편인 것 같긴 하다. 어쨌든 네덜란드의 국립 미술관이니 렘브란트 작품도 제법 많다. 그 중 '야경'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별실에서 복원 중인 모습으로 관람할 수 있게 두었는데, 그조차 색다른 경험이었다.


3. stedelijk

암스테르담에는 museumplein이라고 해서 반고흐 미술관, rijks, stedelijk까지 뮤지엄들이 모여있는 동네가 있다. 하루동안 미술관만 내내 구경할 수 있고 실제로 난 그렇게 했다! stedelijk은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같은 느낌이랄까. rijks가 고전작품들을 주로 다룬다면 stedelijk은 현대미술을 주로 다루고 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무리들이 중간 중간 모여서 작품을 보며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현대미술은 난해하기만 해서 내 취향과는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을 둘러보면서 아 나 의외로 현대미술 좋아했구나 싶었다. 


4. MOCO

이 역시 museumplein에 있는 곳으로, 덜 난해한 현대미술을 모아둔 곳이랄까.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고 작품 수가 많지도 않지만, 뱅크시, 무라카미 다카시, 데미안 허스트 등 모두가 알만한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특히 뱅크시 작품은 미술관에서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편이다보니 MOCO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구옥저택같은 곳이고 방마다 작가별로 구분해두어서 방을 건너다닐 때마다 어떤 작가의 작품이 있을까 기대하며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여행 오기 전까지 있는지도 몰랐고 갈까말까 망설였는데 안 왔으면 후회했겠다 싶은 곳이었다.


5. 마우리츠하위스

네덜란드 헤이그(덴하그)에 있는 미술관으로, 그 유명한 페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이름의 huis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마 부자거나 지위가 높으신(!)분의 집이었을 것 같은 건물에 나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들이 모여있다. rijks에 비하면 규모가 엄청 크다는 느낌은 아닌데, 렘브란트 옆에 페이메르 옆에 반고흐 옆에... 이런 식이어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온갖 관광객들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6. 크뢸러뮐러 미술관

네덜란드 오테를로에 있는 미술관. 반 고흐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네덜란드 여행을 계획하면서 무조건 꼭 가고싶다고 생각한 곳은 딱 두 군데였다. 반 고흐 미술관과 이 곳 크뢸러 뮐러. 반 고흐 관련 책을 읽다보면 유명한 작품의 소장처가 이 곳인 경우가 많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계획을 세우다보니 가기가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 일주 정도가 아니면 패키지 상품에서는 굳이 가지 않는 코스. 그치만 자유여행이니까, 애초에 네덜란드에 가고자 했던 이유가 이 곳이었으니까.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서 가야하는 번잡스러운 여정에 잔뜩 긴장해서 몇 안 되는 블로그 후기를 읽고 또 읽고 캡처해서 또 보고 사진들을 너무 많이 봐서 이미 가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중간 중간 헤매고 삐그덕거리긴 해도 어찌어찌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했고, 이 날은 정말 말로 못할 정도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다. 네덜란드 국립공원 내에 있는 곳이라 오기까지 어려운 것인데, 과연 국립공원답게 끝없이 펼쳐진 엄청난 대자연에 압도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험한 날씨에도 꾸역꾸역 자전거를 끌고 사람 하나 없는 국립공원의 길을 내달리는데 리터럴리 자유로움, 막연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도 돈도 넉넉하지 않으니 한 번 갔던 여행지를 굳이 두 번 갈 필요 없다 주의인데, 네덜란드만큼은 특히 이 크뢸러뮐러 미술관과 호헤벨루에 국립공원은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개인 컬렉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반 고흐 외에도 엄청난 작품들을 한껏 보고 나서 문득, 중요한 걸 빠뜨린 느낌이 들어서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 찬찬히 살펴보는데, 주요 작품 중 하나인 밤의 테라스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일본에서 하는 전시를 위해 대여되었단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길. 어떤 아저씨가 한국분이세요? 말을 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그러게요, 근데 정말 너무 좋아서 오길 잘했다 싶었어요. 하니 본인도 이제껏 가본 미술관 중에 두 번째로 좋았단다. 첫 번째는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미술관이라고. 거기도 가보고 싶었는데 코펜하겐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가지 못했다. 역시 중심가에서 멀어져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그 아저씨는 밤의 테라스 보려고 온 건데 못 봐서 슬프다고 했다. 저는 일본 가려고요. 했더니 자기는 스페인에서 일하고 있어서 일본을 갈 수 없댄다. 대신 다른 유럽은 또 가실 수 있겠네요 라는 말을 너무 열폭 티날까봐 참았다. 20년 전으로 돌아가면 주식도 사야하고 진로도 쓸데없는데 힘빼고 시간낭비 안 하고 어쩌고 할 일이 많겠지만, 최우선순위로 하고싶은 건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것이다.


7. The Depot of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로테르담에 있는 그야말로 '신개념' 미술관이다. 수장고를 개방하여 새로운 차원의 미술관을 선보인 것. Boijmans 미술관이 로테르담의 마우리츠하위스나 Rijks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해서 방문하고 싶었는데 몇 년 전부터 공사한다며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 대신인지 근처에 depot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공간을 선보이는데, 내가 가본 수많은 미술관 박물관 중에서도 손꼽히게 흥미롭고 인상적인 곳이었다. 말 그대로 '수장고'이므로 수많은 작품들이 도서관처럼 창고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걸 유리너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운데 보이드 공간을 만들고 유리 엘리베이터 홀을 만들어서 1층부터 5층까지 쭉 작품들을 걸어놓았다. 중간중간 작품을 복원하거나 보수하는 공간도 볼 수 있게 해두었고, 나름의 기획전시들도 있었다. 소장품의 레인지 또한 엄청나서 일반적인 회화부터 가구, 설치미술, 미디어까지 온갖 종류의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Boijmans만 생각하고 블로그 후기를 찾다가 우연히 이 곳을 추천하는 후기를 보고 가볼까 했던 건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 분은 네덜란드 여행 중 이 곳이 가장 좋았다고 꼽았는데, 솔깃하긴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반고흐/rijks/stedelik/마우리츠하위스/크뢸러뮐러로 museumkaart 임시 버전의 5회 사용권을 다 써버린 후에 숙소 주소를 끌어다 정식 버전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면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길래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만족도가 더 더 높았던 것 같다. 누군가 네덜란드 여행 갈 건데 갈 만한 곳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이 곳을 꼽을 것 같다.


8. Kunsthall

로테르담에는 museumpark가 있다. depot과 함께 kunsthall이 museumpark에 위치해 있는데, 공원을 걷다보면 이 미술관에도 닿고 저 미술관에도 닿고 조각 작품들도 볼 수 있다. kunsthall은 현대미술을 주로 다루는 느낌이었다. 상설전은 따로 하지 않는 듯 했고, 총 다섯관 중에 세 군데서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전시 자체의 무게감은 딱히 없었는데, museumkaart로 무료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더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강당같은 곳이 있었고 진행중인 전시와 관련된 행사를 준비중이어서 그 또한 신기했다. 이것이 예술을 향유하고 만끽하는 유러피안의 모습인가. 


9. 벨기에 왕립 미술관 & 마그리트 미술관

왕립이라니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길지 않은 브뤼셀 일정에도 꾸역꾸역 집어넣었는데 과연 그럴만 했다. 왕립답게 규모도 크고 인상적인 작품들도 많았다. 사실 유럽의 나라들이 대부분 국립/왕립을 단 그 나라 혹은 도시를 대표할 만한 엄청난 미술관들을 갖고 있고 그들은 대체로 결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 작품이 아니면 고만고만하게 기억되는 편인데, 왕립 미술관도 그랬던 것 같다.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미술관 입구쪽 길이 공사중이어서 설마 문을 닫았나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는데, 그런 와중 입구쪽에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인삿말을 걸어둔 것을 보다보니 익숙한 것이 보이는 것이다! 한글이었다. 갑자기 브뤼셀에서 마주친 한국어라니.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다.

바로 그 옆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미술관이 있다. 몰랐는데 마그리트가 벨기에 사람이란다. 반고흐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그의 작품 생애를 훑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두 군데 묶어서 입장료를 사면 좀 더 저렴한 편이니 기왕 구경한다면 두 군데 모두 보는 것을 추천


10. 오랑주리 & 오르세 미술관

사실 아무리 볼 게 많지 않다 하더라도, 각 국가별로 면적이 넓지 않다 하더라도, 열흘 정도의 기간에 베네룩스 3국만 보는 것도 빠듯하긴 하다. 그치만 열네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애초에 여행 키워드도 반고흐 그리고 덕후인데, 오르세는 안 보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았다. 처음 파리를 왔을 때 루브르만 가보고, 정작 내가 좋아할 만한 오르세는 가지 못해서 두고두고 얼마나 한이 남았던지. 남들이 오르세 가봤냐고 물어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 치며 원통했는지 (까진 아니긴 하다). 그리하여 미친 일정을 소화해내며 파리에까지 갔고, 로망의 그 곳, 오르세 그리고 오랑주리를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왔다. 오랑주리는 모네의 수련 연작을 방에서 온전히 즐길 수 있어 유명하다. 나 또한 잔뜩 기대를 했는데, 모네의 의도와는 다르게 명상은 전혀 할 수 없고 시장 한가운데처럼 시끄럽고 모두가 사진을 찍고 있고 프레임을 차지하기 위해 일종의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어쩐지 감성이 촉촉해지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그림들을 보며 황홀경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르세는 정말 최고의 맛집 같은 곳이어서 줄을 길게 늘어섰다가도 금방 줄어들고 또 다시 줄이 금방 생기고 그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바글바글했다. 기차역을 개조하여 만들어서 특유의 공간감이 느껴지는데, 이를 활용한 오르세만의 리듬감 있는 큐레이션 기획이 인상적이었다. 정말 원없이 인상파들과 로댕 등 조각가들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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