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을 찾아서
30살이 되어 정말 세상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40살이 훨씬 가까워지고 만으로 간신히 30대 후반을 유지(?)하는 나이가 되었다. 평균 수명의 거의 절반 가까이 살아낸 셈이다. ‘내 인생’으로 시작하는 지루한 술주정을 늘어놓으며 그동안 살아온 삶을 반추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40살이 가까워 오는 지금, 내가 가진 확고한 취향이나 관심사의 ‘원형’이 어디서 왔는지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무임승차 뉴스레터에 맞는 글짓기인지는 모르겠지만 30살에도, 40살에도 그리고 아마도 50살에도 그대로일 내 인생의 요소 중 몇 가지의 원형을 되짚어 보고 싶다.
강아지: 미국 영화 <베토벤>, <머나먼 여정>
나의 강아지, 동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원형은 아마도 <베토벤>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80-90년대에 비슷비슷하게 양산되었던 헐리우드식 가족 영화 중 하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비디오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던 대형견과 미국 중산층 가정에 대한 환상을 키워준 작품이다. 알프스 산맥 등 험한 환경에서 조난객을 구조하는 이미지로 유명한 대형견 세인트 버나드 독을 주인공 ‘베토벤’으로 하여 1탄은 꽤 성공하였으며 속편도 여러 편 나왔었다. 그러나 헐리우드에 수없이 많은 개, 가족 주제의 영화 중 <베토벤>이 유독 성공했다거나 작품성이 높은 편은 아니고 1탄이 제작비 대비 성공한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1편만큼은 뜨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람 간의 호감도 그렇듯이, 꼭 객관적으로 대단한 작품이 아니어도 이상하게 나와 주파수가 맞는 그런 작품이 있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는 옛날에 비디오와 만화책 등을 유료로 대여해 주던 비디오 가게가 있던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새끼 시절, 베토벤은 동네 펫샵에서 팔리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강아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펫샵에 침입한 개 도둑을 피해 도망가다가 아이 셋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인 뉴튼 가족의 눈에 띄게 된다. 뉴튼 가족의 가장 조지는 개를 혐오하며 절대 키우지 말라고 엄포를 높지만 세 자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베토벤을 키우게 된다. 이런저런 사고도 많이 치지만 워낙 영리한 베토벤은 온 동네와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개로 성장한다. 요즘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한없이 유치하고 개연성 따위 없는 시나리오이지만, 후반에서 초반 개 도둑 및 그 배후의 정체(개들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팔아넘겨 이익을 챙겨 온 악덕 수의사)가 드러나면서 조지를 비롯한 뉴튼 가족은 그들과 맞서 싸우고, 수의사에게 잡혀갈 위험에 처한 개들을 구해주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개를 그토록 싫어하던 가장 조지가 부부 침실에서 그들이 구한 수많은 개들과 함께 잠드는 해피엔딩(?)이 요즘 말로 ‘킥’이라 하겠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지금은 돌아가신 친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머나먼 여정 (1993)>이라는 영화도 꼭 빌려 보았다. 주인 가족이 사정 상 이사를 가면서 지인에게 대신 키워달라고 대형견, 소형견, 고양이 총 세 마리를 맡기고 떠나는데, 그들이 주인을 찾아 제목 그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내용. 노견에다가 워낙 똑똑한 견종인 리트리버, 천방지축 사고뭉치인 아메리칸 불독 그리고 도도하고 까칠한 히말라야 고양이 세 마리가 주인공이며, 애초에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 주연이다 보니 성우가 동물들의 대화를 더빙하여 동물들이 사람 말을 하는 세계관이다. <베토벤>보다 훨씬 덜 알려진 영화인데도 어렸을 때는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몇 번을 봐도 마지막에 주연 세 마리가 주인 가족이 이사간 새 집을 마침내 찾아온 장면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나름대로 이 감동을 너무 자주 접하지 않고자 집에서는 절대 빌려보지 않고 가끔 할머니네 집에 갈 때만 비디오를 빌려서 보는 전략까지 있었다.
어쩌면 한국 아닌 다른 세계를 접해본 적 없는 당시의 어린 나에게는, 개 자체보다는 이 영화들에 나오는 대궐 같은 3-4층집과 마당, 차고, 항상 맛있는 빵과 과일 등이 가득한 서양식 식탁 (요즘은 대다수의 아파트에 설치되어 있는 소위 아일랜드식 식탁) 이 더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베토벤을 보며 미국의 중산층 일상을 동경했던 그 시절,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운다는 건 너무나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1200만이라고 한다. 원룸 자취방에서도 얼마든지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는 시대. 지금의 잣대로 보면 그저 촌스러운 퀄리티의 옛날 영화들이지만 그래도 영원히 나의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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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어느 네티즌의 블로그 |
추리소설: 해문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국내에서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클래식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해문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특유의 빨간색 책등과 팬더 모양의 로고가 트레이드 마크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부모님 특히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크리스티 시리즈 중 몇 권을 번역한 엄마 덕분인지 어렸을 때부터 해문출판사의 크리스티 시리즈가 집에 많이 있었다. 그 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같은 초특급 명작들은 읽고 또 읽었다. ‘-읍니다’ 라는 예전 맞춤법으로 쓰여진 옛날 책들이 더 많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추리소설 사랑의 시작은 분명 해문출판사였다.
야구: 현대유니콘스의 1998년 정규시즌 우승 확정 경기
프로야구를 처음 접하고 중계를 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98년,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아마도 어린이날이었나 어느 공휴일에 당시에 아직 인천이 연고지이던 현대 유니콘스의 홈경기에 아빠가 가족들을 데리고 간 날이 인생 최초의 야구 직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직관 이후 본격적으로 야구에 몰입하게 된 계기가 된 경기는 따로 있다.
1998년 현대유니콘스가 정규시즌 1위(우승)을 확정지은 경기 정보를 정확히 찾아보기 위해 요즘 애용하는 제미나이에게 물어보았는데 뜬금없이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라면서 잘못된 정보를 당당하게 내놓았다. 그러나 곧 죽어도 잊지 않는 건, 날짜와 스코어까지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상대팀은 OB 베어스였다는 것이다. 웃긴 건 이 경기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유달리 유명하거나 중요한 경기도 아니다. 심지어 1998년에 결국 현대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 정작 당해 한국시리즈 혹은 그 이후 현대유니콘스가 우승한 다른 한국시리즈는 분명 챙겨봤을 터인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코시도 아닌 정규시즌 우승이 걸려 있던 이 경기가 야구에 대한 관심의 원형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겠다.
그렇다면 이 경기의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야구를 처음 접한 해에 처음으로 보는 중요한 경기(정규시즌 우승이 달린 경기)인데 스코어도 팽팽하고 무엇보다도 당시 외국인 투수로 활약하던 용병 ‘조스트롱’이라는 선수가 후반에 워낙 쫄깃한 투구를 선보였던 덕분도 크다. 그의 공 하나하나에 티비를 껐다가 켰다가 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아무리 인터넷을 찾아봐도 1998년 9월 4일 당시의 경기영상이나 하이라이트는 찾지 못했지만.
바꿔 말하면 1998년에 이 경기를 손에 땀을 쥐면서 가족이 다같이 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보는게 내 인생에 이득이었던 셈인가? 하지먼 98년 그 경기를 티비를 껐다 켰다 하며 열심히 관람한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을 한참 뒤로 하고, 나는 40이 다 된 현재까지도 야구 팬 소모임을 직접 운영하기까지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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