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큼 재미있지만 찜찜함을 남기는
‘나치가 살린 독일 역사’라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이 있다. 대략 제목에 ‘나치’, ‘히틀러’가 들어가면 재미 없는 내용이라도 혹은 같은 내용이라도 더 잘 팔린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나치’, ‘히틀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어그로를 끌기 좋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나만 해도 제목에 ‘히틀러’가 들어가면 눈길이 간다. <히틀러 최후의 14일>,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모두 제목 어그로(?)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경험을 선물한 책이다. 그뿐인가 히틀러가 소재인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지, 히틀러의 최후를 그린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에서부터(다운폴) 히틀러 암살시도를 소재로 한 영화(작전명 발키리), 그리고 타란티노 특유의 상상력으로 히틀러를 과감히 죽여버리는 영화까지(바스터즈 거친녀석들) 확실히 나치, 히틀러는 대중문화에서 사랑(?)받는 소재인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게 된 책은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이건 또 무슨 어그로람, 하며 눈을 흘겼지만 어찌 읽지 않을 수가! 히틀러가 먹는 음식을 미리 먹고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 일종의 기미상궁 역할을 하게 된 여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인데, 대충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면서도 ‘실화’만이 주는 구체적인 에피소드, 당시의 상황과 느낌이 궁금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 일단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소설, 즉 가공된 이야기이다. 따라서 (소설인 줄 모르고 읽었던)내가 바라던 그때 당시의 긴장감, 생생함, 역사로는 배우지 못할 남모를 후일담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까 진짜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다기 보다 아무리 당시의 긴장감, 생생함, 뒷이야기가 나온다 해도 실화라는 딱지가 떨어지고 작가의 상상력이 붙은 소설이라고 하면 신뢰감이 한풀 꺾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당초 가졌던 기대를 접고 소설로서 이 글을 읽는다면 금세 몰입되고, 뒷내용이 자꾸 궁금해지고, 한문장 한문장 맛깔나게 결이 살아있는,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런데 또 이 점이 찜찜함을 남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히틀러와 나치의 ‘부역자’들이다. 모든 이야기는 몰락과 고통에서 시작되므로 단순히 이런 점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꼭 주인공이 나치의 부역자가 된 자신에 대해 통렬히 고민하고 번뇌해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히틀러의 안위를 보전하는 데 큰 자부심을 느끼는 히틀러 추종자이지만 본성은 선하고 상냥한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주인공 아닌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는 인간의 선함과 악함이란 대체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문제는 나치의 부역이라는 소재를 얼마 만큼 진지하게 다루느냐에 있다. 한데 여기서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행위란, 나치의 부역이란 그저 오락소설의 이야깃거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느낌이다.
베를린이라는 큰 도시에서 멋쟁이로 살던 주인공이 전쟁의 폭격으로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불시에 히틀러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판별해야 하는 시식가가 되고, 같은 시식을 하는 동료들과 다투기도 우정을 나누기도 하다가 남작 부인의 집에 초대되면서 급기야는 나치 친위대 장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말이다. 물론 주인공은 히틀러와 나치의 옹호자도 아니며 그릇된 사상을 심어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실제로 존재했던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나치의 부역이라는 행위를 이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재미있게 읽어도 되나 하는 찜찜함이 남는다. 만약 앞서 언급한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녀석들> 같이 아예 오락영화로서 소재만 가져왔을 뿐 허구라는 판을 깔고 거침없이, 시원하게 상상력을 펼쳐 나가는 소설이었다면 되레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치의 부역에 대한 죄책감은 예의상 한 꺼풀 벗겨두고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은 그 점이 찜찜함을 남기는 것이다.
책 소개를 보면 평범한 인간인 로자(주인공)가 스스로 악을 행한 자와 악의 없이 악한 임무를 수행하는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악의 평범성’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악의 평범성이란 이렇게 오락적인 전개 대신 좀 더 건조하게 일상을 그렸어야 새삼 그것을 실감하고 돌이켜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예를 들어 영화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에서 처럼 성실하게 악한 임무를 수행한 한 여자를 바라 보는 식으로 말이다. 더구나 전범국 국민이 처한 고통에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먼저 느끼기에는 식민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조금 고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일본이 원폭 피해를 호소하거나 가미카제의 비극을 얘기할 때처럼말이다.)
이렇게 재미있지만 왠지 찜찜함을 남기는 책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에 대한 감상을 떠오르는 대로 남겨 보았다. 책은 실제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했던 마고뵐크의 인터뷰를 토대로 쓰여진 소설인데 소설이 아니라 그녀의 회고록을 읽었다면 설령 이 책에 나온 오락적 요소들이 다 진실이었다 해도 그리 찜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화가 주는 나름대로 가치 있고 귀한 후일담이니 말이다.
다소 냉소적으로 감상을 적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거듭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이고, 나치의 부역이라는 거북한 소재가 너무 오락적으로 쓰이는 것 같아 찜찜한 것뿐이지 심지어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편이다. 그리고 사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절반 남짓 읽은 상태에서 적은 거라 뒷 내용에 대해서까지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섣부른 짐작으로 비판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그 어떤 질책도 환영이니 함께 이 책을 읽고 떠오르는 여러 부유하는 감상들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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