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OO

 


2023년 결산을 위해 2022년 결산과 2023년 다짐을 다시 둘러보고 왔다. 그때의 뼈대를 가져오고 내용을 피드백하는 형태로 2023년 결산을 보고해본다.


올해의 영화

전년과 비슷하게 한 달에 한 번꼴로 영화를 봤다. 기대했던 대로 오펜하이머와 미션임파서블 데드레코닝을 챙겨보았다. 두어시간만큼은 극장에서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둘 모두 올해의 영화로 꼽기는 좀 아쉽다. 내가 무슨 3대 영화제 심사위원도 아니니 작품성의 차원에서는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쾌감의 기준에서 그랬다. 마블 시리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가오갤3는 그야말로 '흡족한' 피날레였다. 어쩌다보니 2023년 유이한 천만영화 범죄도시3와 서울의봄을 보았는데, 사전에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만족스러웠다. infp이자 영화광인 배우 이준혁을 응원합니다. 베스트라고 꼽지는 못하겠지만, 유령은 그야말로 아드레날린이 뿜뿜했다. 개봉 당시 어영부영 하다가 놓치고 최근에 OTT를 통해 겨우 봤는데, 솔직히 초반에는 산만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는데, 박소담의 '바로 그 순간'부터 말 그대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전체적인 매무새가 세련되거나 매끄럽지는 않지만, 오히려 거칠기 때문에 느껴지는 날것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올해의 영화가 뭐냐고? 그건 역시... 슬램덩크 아닐까...?


올해의 책

책은 키워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극과 극의 소설, 두 번째는 새로운 세계로 눈을 뜨게 해 준 인문사회 분야, 마지막으로 오디오북이다. 전년에 이어 추리소설이 아닌 서사를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초급한국어, 취미는 사생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였다. 잔잔해보이지만 이상하게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와 다르게 페이지 터너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추리소설 작가 정해연을 만난 것도 올해의 행운이었다.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다음 소설을 기다리게 만드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다. 언러키스타트업, 재능의불시착, 사랑의이해는 요즘 흔히 말하는 '판교문학'류인가 싶기도 한데, 어쨌든 쉽게 잘 읽힌다. 책 읽어보고 싶긴 한데, 책 읽을까 싶긴 한데 -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권할 만하다. 그나저나 정확히 무엇이 시발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영업자를 두고 고객들 저마다의 사연을 늘어놓는 류의 비슷한 패턴의 소설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왔고 놀랍게도 그것들 다수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난 그 중 휴남동 서점, 고바야시 서점, 카스테라, 코코아, 메리골드 세탁소 등을 읽었다. 대체로 나쁘진 않았지만 창작자나 독자나 서로 게을러지는 방향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종의 드라마화를 노리는 요즘의 콘텐츠 창작법인가 싶기도 하고.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가짜노동,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에이징 솔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꼭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충격적일 정도의 신선함, 놀라움, 지적 허영심 등등을 모두 충족시키는 책이었다. 번역 때문인지 그것이 함의하는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 재미있으니 강력 추천한다. 그리고 두구두구 드디어 나도 합류했다, 오디오북의 세계!!! e북도 손(혹은 눈)에 잘 안 잡히는 보수꼰대아날로그독자로서, 오디오북은 더더욱이나 손이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최태성의 최소한의 한국사를 듣다가 재미를 붙여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열 권 내외의 책을 읽은 것 같다. 특히 이종관의 현장검증 같은 건 오디오북이 아니었다면 내가 먼저 찾아 읽진 않았을 것 같은데 꽤 재미있었다. 그 책과 함께했던 며칠이 내내 즐거웠다. 


올해의 전시

올초 다짐대로 갤러리들을 둘러보았다. 타데우스 로팍은 이상하게 가려고 할 때마다 전시를 쉬는 타이밍이어서 못 갔지만, 리만 머핀에서 하이디 부허의 개인전 '란사로테'를, 파운드리 서울에서 마틴 그로스 개인전 '드림 파일'을 보았다. 국제 갤러리에서는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을 보았는데, 데미안 허스트 생각이 나고 힙한 느낌이 나서 나도 모르게 건들거리며 전시장을 휘젓고 다녔다. 한편,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은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전후로 병원도 다니고 회사 일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도 생기면서 못 갔다. 내년...내년에는 갈 수 있을까... 기대했던 대형 전시들 중에 예상만큼 좋았던 건 내셔널 갤러리전이었다. 역시 난 취향이 뻔하다고 해야 할까, 고루하다고 해야 할까. 정말 박물관에 있을 법한 작품들이 좋은 걸! 그러나 당신도 미감이 있다면 red boy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견딜 것이다. 가장 최근에 충동구매처럼 찾았던 대림미술관의 미스치프 전시도 인상적이고 재밌었다. 온갖 mz청년커플들이 몰려와 난장판같았지만, 그마저도 전시의 일부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올해의 노래

백현과 아이유는 나에게 왜 신곡을 들려주지 않는가. 혹시 올해 나왔었는데 내가 까먹었던가 싶어서 멜론이랑 벅스 들어가서 다시 검색해보고 왔잖아. 아쉽다. 대신 라이즈가 있었다. 겟어기타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좋은 곡이라서 듣는 내내 믿을 수가 없는 마음으로 들었다. 친구들에게도 얘기했지만, 이건 정말 소녀시대 '지' 수준으로 '얻어걸린' 곡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다음 나온 톡섹시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러나, 역시 겟어기타는 좋아. 심지어 수록곡 메모리즈도 정말, 정말 좋다. 합쳐서 5분은 되려나, 그 두 곡에 연습영상에서 추출한 사이렌을 합쳐 출근길 퇴근길 외근길 상경길 하경길 수많은 길, 수많은 시간을 채워넣었다. 샤이니의 8집 정규 앨범도 정말 좋았다. '정규 앨범'에서 대체로 만족스럽기가 쉽지 않은데 15주년을 맞이한 샤이니가 그것을 해냅니다. 남자아이돌만 연속으로 얘기했지만 사실 세상은 여전히 여자아이돌 강세인것 같다. 남들 다 듣는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에스파 노래를 나 역시도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이 2023년의 신곡이거나 하나의 곡은 아니지만) 레드벨벳의 킬링보이스다. 지금 보니 조회수가 923만인데, 그 중 90회쯤은 나의 재생횟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혹시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그야말로 2023년 '산업과 경제' 그 자체였던 테일러 스위프트. 언젠간 나도 테일러의 공연을 보러갈 수 있겠지. 아마도.


올해의 소비/먹킷

맥북병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대구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다른 곳에서 푸딩 빙수를 먹었고 파르페도 먹었고 다양한 케이크도 먹고 다녔다. 그 덕에 인상적인 하나의 소비는 없이도 1만2천원, 1만8천원 등등을 구천번 써서 육십억을 써버렸다. 특히 푸드떼의 파르페는 진짜 비싸서 '아 이건 에반데' 생각하면서 먹었는데 솔직히 맛있기도 하고 직원분들이 매우 친절하셔서 '그래 이것은 경험값이야' 하며 피눈물을 머금었던 기억. 올해 츄러스와 휘낭시에에 유독 꽂혔는데, 춘천의 모요와 송파의 르말뒤페이, 강남의 FYI의 휘낭시에가 그야말로 '겉바속촉'이니 다들 한 번쯤 자셔보시길. 츄러스는 사실 그냥 갓튀긴 거면 그럭저럭 다들 맛있긴 해요.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향수병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이버 검색어로는 찾지 못했다. 대충 그런 비슷한 감정을 나는 캐나다에 품고 있다. 덕분에 팀홀튼의 아이스캡은 제법 오래된 그만큼 꿋꿋한 먹킷 중 하나였는데 며칠 전 30분의 웨이팅 끝에 신논현역의 한국 팀홀튼 1호점에서 이룰 수 있었다. 맛있긴 맛있는데, 앞서 말한 그 아련한 감정 같은 건 금세 녹든지 기화하든지 뭐 그렇게 되는 맛이었다. 리사르는 유명세에 비해 공간 자체가 인상적이진 않았는데, 진짜 '맛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맛으로 승부보는 곳. 길동역 쪽에 바하마스 라떼도 정말 맛있었다. 아니 근데 이런 식으로 늘어놓자면 정말 끝도 없이 많기 때문에 이쯤에서 자제한다. 이 정도면 그냥 맛집블로거 해야할듯.


올해의 콘텐츠

생각해보니 올해 책, 영화, 음악 그 무엇보다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했던 건 팟캐스트와 유투브 채널들이었던 것 같아서 몇 개 꼽아본다. B주류 경제학은 솔직히 일반인 남자가 나와 잘난척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도 솔깃할만한 주제를 다뤄서 재미있게 몇 번 보았다 (쩝) 방구석 1열 속 변영주 감독님의 말빨에 반해 무비건조까지 흘러가게 됐는데 주성철 아저씨한테 정이 드는 찝찝한 기분이라 적당히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다. 영화 이야기라면 역시 김혜리의 필름 클럽이다. 나를 가장 편안하고 평온하게 한다. 그런데 가끔 신기할 정도로 사람마다 매체마다 평과 해석과 설명이 다른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말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그리고 김지윤의 롱테이크!!! 이건 사실 나만 알고 싶어서 숨길까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조회수가 높은 것 같아서 말해본다. 본 채널(?)인 지식플레이도 유익하지만, 오랜 친구인 전은환님과 함께 하는 롱테이크는 정말 소재도 내용도 무궁무진하다. 아는 거 많은 여자 둘이 끊임없이 지식 수다가 펼쳐지는 현장 매우 흥미롭잖아요. 물론 두 분의... 그... 편견이랄까 엘리트 부르주아 (?) 특유의 나이브함이랄까, 불편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안합니다 불편한 게 너무 많은 례민충이라 어쩔 수 없음), 내가 꿈꾸던 콘텐츠 형식과 비슷해서 늘 다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맛있는 간식을 아껴먹듯 한주 한주 아껴서 재미있게 듣고 있답니다. 


길게 주절주절 늘어놓다보니, 왠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할머니가 된 기분인데, 이게 기분이 아니라 실제였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지난 뉴스레터에서 했던 말들을 또 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제가 이렇게 일관성 있는 사람입니다. 24년에도 좋은 면에서 일관성 있기를 바라며... 문제는 정작 언급했어야 할 무언가,는 빼먹은 기분이 든다는 것인데, 23년의 다사다난함이 어찌 한 편의 글로 정리될 수 있으랴. 그저 24년에는 재미없는 천국에서 살 수 있길 바라며 (물론 이렇게 쓰고 있는 이 순간마저 이미 그른 것 같다고 예감하고 있음) 모두의 새해 복을 기원합니다! 얍얍!!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 남이 연애하는 거 좋아하네

소녀의 로망

곁다리 라이프의 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