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박완서 선생님
2011년 모 회사(관악머시기,,,)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같이 일하던 사람 중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가 어느 날은 평소와 다르게 유독 조용히 일을 하던 날이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부랴부랴 갈 채비를 하던 그에게 누군가 어딜 그렇게 가느냐고 묻자 “박완서 선생님 장례식에 간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만큼 가볍고 얄팍한 인간일 거란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터라 대문호의 장례식엘 간다는 것이 몹시 의외였다. ‘대문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한다니, 실은 굉장히 학식있고 진중한 성품일지도 몰라’하며 그 이에 대한 못된 선입견이 한꺼풀 벗겨지는 스토리면 좋았으련만 나는 아주 일천한 상상력과 그에 걸맞게 미천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번에는 그 선입견의 화살을 반대로 대문호 박완서 선생님께 돌려 ‘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작가가 아닐지도 몰라’ 하며 그 이가 보인 의외의 좋은 모습을 애써 부정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랬다. 그러니까 굳이 앞선 기억이 아니더라도 내가 품고 있는 박완서 선생님의 이미지는 좀 그런 것이었다. 이미 한 세대가 지나버린 작가, 교과서로나 보는 작가, 문학사적인 가치는 있겠지만 별 읽는 재미는 없는 작가였다. 특히 입시 때 봤던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이란 게 전쟁의 상흔을 감싸안거나(<그여자네 집>)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회복(<옥상에 핀 민들레 꽃>)을 논하는 휴머니즘적 작품이 전부였던 까닭에 무의식 중에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죄다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었다.
다만 박완서 선생님에 대해 강렬하게 남은 기억 한 가지, 그건 바로 선생님이 마흔에 처음 집필을 시작해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흔은 남의 얘기만 같던 대학 시절, 이상은 높지만 능력은 한참 부족하고 그걸 메꿀 만한 용기나 끈기도 없던 때, 마흔에도 새로운 걸 시작해 크게 이뤄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던지. 만학도의 꿈 같은 패기 넘치는 희망은 아니더라도 ‘나도 언젠가는’ 하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 내 게으른 모습과 상태 그 모든 걸 잠시 유예해 주는 느슨한 그물 같은 역할을 해 준 것이 선생님의 늦깎이 등단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다시 박완서 선생님을 떠올렸다. 영어도 잘하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운전도 하고 싶고(이건 이제 성공!) 수영도 하고 싶고 언젠가는 외국에서 살아도 보고 싶지만 그중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서른 여덟이었다. 마흔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엇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을 무렵 애기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던 길에 충동적으로 중고서점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장편 소설을 있는 대로 구입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휘청거리는 오후> 두 권이었다.
그리고 이 두 권을 시작으로 이제야, 마흔이 다 돼서야 박완서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글을 써냈던지를 알게 된 것이다. 작가의 덕목을 말할 때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진실됨이 아닐까. 스스로 가지고 있는 위선, 우월감, 허영, 질투, 못되고 못난 마음들을 가감없이 공개적으로 털어 놓을 수 있다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굳이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독자랄 게 없는 나만 해도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기란 쉽지 않아서 어떻게든 적당히 꾸미게 되고 그런 글마저 누군가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가도 막상 읽힌다고 생각하면 숨기고 싶어지는데 작가로서 내 생각이 담긴 글을 공개하는 일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할는지.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두고 흔히들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있다’고 한다. 인물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있어 선생님의 예리한 통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텐데 이는 박완서 선생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모순된 모습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드러냄으로써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착한 것을 괴롭히는 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착한 것에 대한 거룩한 의리를 지킨 것처럼 자위하려는 것 같았다. … (생략) … 자신의 나쁜 마음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오히려 남들의 동의를 얻어내고 있었다. 수지는 남들도 다 오목이를 미워하고 오목이가 없기를 바라는 걸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중
고로 수지는 오목이를 놓친 게 아니라 놓은 거였고 어린 마음에 선악의 의식 없이 놓은 게 아니라 충분한 죄의식을 가지고 저지른 것이었다 … (생략) … 그녀 역시 옛날에 한 숟갈의 밥을 덜어내기가 싫어서 한 개의 고구마를 빼앗기는 게 아까워서 아무도 모르게 동생을 내다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중
수지와 연애하고부터는 이렇게 그의 앞날뿐 아니라 지난날까지가 아름다운 무지개가 되었다. 앞날이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에 무지개일 수 있었던 것처럼 지난날은 수지가 한번도 실제로 만져보지 못한 거여서 자유자재로 무지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식장에서 만난 인재의 노모의 모습은 수지에게 아름다운 추상이었던 가난의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 (생략) …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 인재를 괴롭히고 있는 건 그의 지난 가난의 모습을 수지에게 들켜서가 아니었다. 더이상 무지개일 수 없게 된, 그가 엉겁결에 도달하고 만 성공이라는 것의 정체의 그 보잘것없음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중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초희가 간혹 아이들에 대해 생각한 대로라면 이 아이들은 조그맣고 불쌍해야 했다. 그리고 자기는 장차 조그맣고 불쌍한 아이들의 의붓엄마 그러니까 콩쥐 팥쥐의 엄마, 장화 홍련의 엄마일 수도 있었다. … (생략) … 의붓엄마는 의붓자식의 행불행을 손아귀에 꽉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생략) … 초희는 앞으로 이 아이들의 행불행이 자기손에 달린 게 아니라 자기의 행불행이 이 아이들 손에 달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중
그러면 그렇지 가엾어라. 세상에 가엽기도 해라. 친구를 부러워하느니보다는 가엾어하는 게 훨씬 속 편하다. 그나저나 자포자기한 결혼이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들은 미선이를 가엾어하다 말고 재빨리 호기심이 동한다 … (생략) … 말희는 엉뚱스럽게도 이런 미선이의 모습에서 배신당한 듯한 충격을 받았건 것이다. 세상에 남자한테 버림받은 주제에 감히 제가 행복할 수 있다니. <휘청거리는 오후> 중
그의 가정은 경제적 부유와 문화적으로 세련된 감각과 가족적 화목이 적절히 조화된 모범적인 상류가정이지만 그와 그의 가정을 그렇게 만든 건 애숙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혁주가 잘 알고 있다. … (생략) … 애숙의 수완의 가장 큰 미덕은 혁주로 하여금 조금도 아내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걸 못 느끼게 하면서 성취감을 만끽하게 하는 거였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중
그녀는 연탄을 안 갈고도 지난 겨울의 그 혹독한 추위를 전혀 모르고 지낼 수가 있었고, 기후에 대한 무관심은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중
이처럼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문장이 한 페이지가 넘어가기 무섭게 등장하는 한편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죄다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것이 머쓱해질 만큼 아주 재미있고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려)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사로잡기도 한다. 게다가 일견 자극적인 세태소설처럼 느껴지다가도 위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문장으로 마음을 섬찟하게 하는 데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서구의 엘레나 페란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으며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자극적이면서도 통찰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는 이미 박완서 선생님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박완서 선생님에 대해 접한 단편적인 이야기 중 기억에 남았던 게 또 하나 있다. 아들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잃자 너무 슬픈 나머지 ‘아들 대신 딸을 잃었더라면 덜 슬프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던 이야기인데(지금 찾아보니 <한 말씀만 하소서>에 나온 이야기인 것 같다) 당시에는 단편적인 그 이야기만 듣고 선생님을 조금 실망스럽게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건 아주 조금도 위선을 부리지 않고 쓴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용기있는 솔직함이 선생님의 글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조금도 억울하지 않은 내 마음이 문제란 말야. 남성 우위를 짓밟지 않으면 동등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성우위를 보호해 줬을 때 오히려 편하고 맞서려면 불편해져. <서 있는 여자> 중
연지는 결혼한 친구 중에서 제일 못사는 편이었지만 그걸로 부끄러워하거나 주눅든 적이 없었던 것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 (생략) … 그러나 잠깐 사이에 그녀의 삶은 독창적인 알맹이를 잃고 도식적인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모든 남자와 여자가 만나 도식적으로 살 바에야 철민이하고 결혼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 (생략) … 연지는 자신의 결혼이 적어도 그런 장삿속만큼은 극복하고 시작됐다는 자신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걸 극복하기는커녕 거기도 못 미쳤다가 이제야 겨우 거기 도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 도달해서 새삼스럽게 살펴본 자신의 생활은 얼마나 너절한가. 문득 참담한 실패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서 있는 여자> 중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신념은커녕 여성이 해방이 되면 지금보다 행복해지려는지 불행해지려는지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해방을 원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생략) … 진부한 생각이지만 살림살이가 여자의 천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평소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길러질 뿐이라는 보부아르의 말을 믿는 편이지만 이럴 때는 역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의 작품을 위해 그까짓 양말짝을 잃고 고춧가루쯤 못 먹게 됐다고 그다지 가책받고 상심하는 심리를 설명할 수가 없다.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중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일단 스스로의 부족함과 결함을 인정해야 한다. 자칫 자기만족적인 반성으로 빠질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 해도 스스로를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 선생님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순은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과거에는 박완서 선생님을 몰랐기에 그저 전쟁의 상흔을 감싸안는 휴머니즘적 작가로 생각했다. 물론 이 역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마흔이 되고서도,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다 키우고서도 글을 쓸 수 있던 것은 도저히 털어놓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전쟁이 남긴 그 강렬한 상처와 기억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글을 쓰는 것은 선생님에게 치유의 과정이었을 테고 선생님의 진실하고 솔직한 글을 읽다 보면 자연히 이 어찌할 수 없는 혼란과 모순의 세상과 인간을 받아들이고 애정을 품게 된다. 그것은 내게도 일종의 치유였다. 만일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내심 못마땅했다던 그 이를 붙잡고 ‘빈소에 함께 가면 안되느냐’고 매달렸을 것 같다. 그때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늦었지만 부디 평안하시길 빌며 나는 아직도 많이 남은 선생님의 책을 읽으러 가야겠다.
여담 1. 박완서 선생님이 전쟁 전후 머무르던 돈암동 일대는 마침 내가 얼마 전 이사 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소설에서 삼선교, 성북경찰서, 아리랑고개, 정릉천 등 익숙한 지명이 나오면 그렇게 반갑다. 괜히 일상적으로 다니던 동네를 보는 재미가 새롭다. 불과 십몇 년 전까지 선생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던 목욕탕 ‘신안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신안탕까지 볼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리고 학교 생활을 하던 현저동과 사직공원 일대도 결혼 전 살았던 공덕동 생활권이어서 매우 친숙한데 다닥다닥 붙은 게딱지집, 개량 한옥, 미로 같은 언덕 길 등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이미지로나 기억되는 서울의 구도심이 주는 그립고도 애상적인 정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여담 2. 성 씨로만 보면 누구나 양반 집안이지만(세상에 전주 이 씨 아닌 사람 찾기가 더 힘든 법) 진짜 찐양반 집안인지를 따져 보려면 과연 우리 집안이 무슨 학파였는지를 따져보면 된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자손이 동인 아닌 서인이 될 수 없었듯 과거에 양반 자손은 무조건 선대의 학파를 따르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 선생님 가문은 찐양반 가문이긴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부군을 데리고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선생님 어머님이 부군의 성인 ‘호’ 씨만 듣고도 낙담하는 기색을 보이며(니 어데 호 씨고) 우리 같은 노론 집안이 중인 집안과 결혼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던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게 아주 재미있게 읽혔다. 만약 우리 집안이 노론인지 소론인지 노론 중에서도 시파인지 벽파인지 그런 걸 안다면 찐양반 집안의 후손이므로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물론 저는 노비 집안의 후손인 것 같습니다.
여담 3. 선생님은 젊었을 적 오빠의 영향 때문도 있지만 좌익 사상에 감화된 적도 있는데(당시 지식인 치고 그렇지 않은 이도 드물 듯) 막상 전쟁 중 인공 치하의 서울을 겪고 오히려 인공 치하의 시절을 아주 비인간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인민이 평등히 땅 한뙈기 나누어 갖고 건강히 농사지어 사는 삶은 일견 인간적일 것 같지만, 무엇이 됐든 이 땅에 살아 숨쉬는 인간보다 하늘 위의 이념을 앞세우는 극렬한 이상주의는 결국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음모와 사기가 들끓는 자본주의의 퀘퀘한 일면이 훨씬 인간적일 정도로. 이와 관련해 또 인상적인 구절을 남겨 본다.
이 놈의 나라가 정말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도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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