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공부, 수능을 다시 생각하다

 

 

  일단, 시작하기에 앞서 이토록 구체적이고 생생한 글로 현재 대한민국 입시판을 알기 쉽게 전달한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금 이 입시 체제는 어딘가 잘못 되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해묵은 문제 제기에 비해 실제 입시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 만큼 현상 파악에는 무지했던 입시 담론에, ‘바보야, 문제는 공교육이야’ 일갈하며 문제를 직시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속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이제까지 겉으로 보이는 증세만으로 약을 처방하려고 했으니 모든 처방이 무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아픈 곳을 고치기 위해 ‘어디가’, ‘어떻게’, ‘왜’ 아픈지 하나씩 짚어가는 이 책은 해답지보다는 오답노트에 가까우나 해답을 진정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답노트가 필수인 것처럼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이 책이야 말로 해답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보야, 문제는 공교육이야’ 라고 요약했지만 사실 그렇게 쉽게 공교육을 ‘뜯어 고치자’는 식의 접근은 이 책에서 가장 조심하는 바이다. 오히려 모든 문제는 풍선효과처럼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부풀어 오르므로 ‘당장 이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문제의 모든 측면을 꼼꼼히 따져보자’가 책의 주장에 가깝다. 따라서 문제가 분명한 상황을 두고도 이것이 최악을 피한 차악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 입시란 수험생이라는 당사자의 입장을 벗어나면 일단 남의 일이 되어 쉽게 말을 얹을 수 있는 데다가 수험생들은 당장 눈 앞의 입시가 급해서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고 수험생으로 쉽게 일축하나 그 수험생들이 처한 상황 또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주입식 교육과 사지선다형 시험 방식이 문제이니 앞으로는 입시를 전부 논술형 또는 생활기록부 평가로 갈음하겠다고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날 것이 뻔하듯(목적에 방식이 부합하는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실한 답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렇게 맥빠지고 모호한 책이 아니다. 되레 읽다 보면 문제 상황에 분노하거나 바꾸어야겠다는 투지가 솟을 정도로 생생하고 명확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책에 그런 생동감을 부여했을까.

  먼저 이 책은 변화한 입시의 오늘을 설명한다. 수능이 끝나면 예외 없이 ‘난이도’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난이도 조절이 성공적이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 출제위원장의 사퇴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자연히 평가원은 자리 보전을 위해 1)등급별 인원비율을 예년처럼 유지하기를 바라게 되고 거기에 2)출제범위 및 선택과목 축소, 3)퍼즐식 킬러문항을 위시한 ‘수능의 콘텐츠화’가 병행되며 현재의 수능 공부가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반교육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풀어 설명하면 응시인원 대비 1등급의 비율과 점수대는 예년과 비슷해야 하는 압박이 명백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출제 범위가 좁아짐에 따라 낼 수 있는 문항에도 한계가 생기고 ‘오르비’로 대표되는 수능커뮤니티 특유의 출제문화 및 ‘N제 모의고사’ 등 (개념 이해가 아닌)문제풀이가 일반화 되며 ‘킬러문항’이라는 난해한 퍼즐식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도쿠 풀이와 같은 퍼즐식 수능 문제는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기르기보다는 기계적인 문제풀이 즉 ‘사고의 외주화’를 촉진한다. 그리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이 모든 문제는 맞물려 돌아간다.

  책은 이처럼 생생한 입시의 면면을 계속해서 보여 준다. 수능뿐 아닌 학생부 교과전형, 학생부 종합전형, 논술 등 입시의 모든 부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다. 읽다 보면 ‘요즘 같으면 나 대학 못가겠네’하는 자조 섞인 농이 나오다가도 결국 고단한 학생들의 현실에 집중하게 된다. 입이 떡 벌어질 고액과외와 스터디를 받는 드라마 속의 비밀스러운 집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험생 모두의 고단한 입시 현실에.

  놀라운 점은 그렇게 입시 현실을 따라가다 보면 이 반교육적 입시 세태가 비단 입시의 당사자인 수험생들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커다란 낭비를 낳고 해악을 끼친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험생 출제문화로부터 비롯된 노동력 착취와 열정페이 문제, 수능과 수시의 이분법화에 따른 정보 격차(입시가 준비과정에 있어 상호간 접점이 없는 수능과 수시로 완전히 이분화되면서 지방에는 기존에 있던 수능 대비 학원마저 소멸해가는 상태이고 수시 준비 또한 명확한 정답이 없는 정성평가라는 제도의 허점 탓에 정보수집이 용이한 학군지 학생들에게 유리해지는 것)와 그로 인한 지방 학생들의 박탈감과 열패감 같은 사회 문제들을 접하면서.

  적재적소에 실린 학생, 교사, 사교육 강사와 업계 종사자 등 입시 현장 당사자들의 인터뷰 역시 책의 생동감에 한몫한다. 글맛이 살아 있는 느낌 또한 좋다. 학력고사까지 거슬러 올라가 최초로 수능이 도입되었던 시점부터 시작해 수능의 판도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짚어가며 콘텐츠 중심이 되어버린 현 입시판에서 그 유명한 ‘강남대성’의 아성을 무너뜨린 시대인재학원의 등장을 논하는 부분에 이르면 정말 흥미진진해진다. 


  이에 따라 오르비는 자체 인터넷강의 플랫폼을 런칭(2012)하거나 오프라인 학원을 개설(2013)하는 등 폭넓은 외연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시도들이 사교육 산업의 판도를 바꿀 만한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오르비는 아마추어 창작과 영리 활동의 경계가 흐릿한 디지털 플랫폼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중요성은 여전하지만 등용문 이상으로 도약하진 못한 것입니다. 대신 대치동의 한 학원이 개척자 역할을 넘겨받습니다. 수학 단과 학원으로 시작해 10년 만에 수천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주)하이컨시, 즉 시대인재학원 이야기입니다.


  오르비에 기반을 둔 수험생, 대학생 출제진을 대거 영입해 과학탐구 영역 문제은행 구축에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시대인재학원에 추가된  서바이벌 모의고사 생명과학 II와 연관강의 커리큘럼은 초고득점 수험생들 대다수를 끌어오는 계기가 됩니다. (중략)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세를 불린 시대인재학원은 2017년에 재수종합반을 설치하고 2020학년도 수능에서 단 2년만에 강남대성학원을 실적으로 누르며 대치동의 패권을 거머쥡니다. 


  그런가 하면 ‘붉은 여왕 효과’, ‘긱 이코노미’, ‘레크비츠의 단독성들의 사회’ 등과 같이 적절한 사회과학 개념과 정의를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현상을 요약하고 마찬가지로 주제가 마구잡이로 뻗어나가지 않게끔 틈틈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위해 어떤 사례로 논증을 했는지, 이를 바탕으로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중심을 계속해서 잡아준다. 즉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인 것 없이 밀도가 꽉 찬 책이다. 잘 쓰인 르포르타주란 바로 이런 글이 아닐까.

  <가짜 노동>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자기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 실질적인 성과와 관련 없이 그저 바쁜 일, 정말 중요한 일과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뒤섞여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현상을 가짜 노동이라고 일컫는다. 입시판으로 초점을 옮긴다면 현재 입시를 위한 공부는 주객이 전도된 가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한 사고력과 논리력 이해력 평가’라는 시험의 본래 취지 대신 ‘적당한 수준의 등급 비율 유지를 위한 퍼즐식 문제’, ‘명문대라는 타이틀을 수호하기 위해 교묘하게 학군지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재편된 수시 전형’ 등과 같은 변질되어 버린 시험이 유지되는 이상 학생들이 가짜 공부에서 벗어날 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당장 해결책을 찾진 못할지라도 우리가 가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메타적으로 인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은 줄고 보다 실질적인 해결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이 오답노트와도 같은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당장 지난주에 수능이 있었다. 물수능인가 불수능인가 기사가 쏟아지는 와중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이 입시판에서 힘든 경주를 했는지 씁쓸한 마음이 먼저 든다. 모두에게 노력한 만큼 공평한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뜬구름 같지만 지극히 당연한 바람만을 막연히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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