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이미 글렀으니 2025년엔 달라진 나를 노린다
매년 한 해를 떠나보내면서 이런 감상이 들지 않는 연도가 있으랴. 그런데 2024년은 정말 ‘찐’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너무나 많은 이슈와 사건사고들이 있었고 또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이 글을 쓰는 12월 29일인 오늘에도 말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든 -든 일상에 아주 크게 변화가 없었던 2024년이었기에 기분이 더욱 묘하다. 여름철에 한 달 정도 팀 내에서 알게 모르게 은따로 힘들었던 것이 가장 큰 일이려나. 은따라는 단어도 10대 때나 입밖에 내어 봤을 단어 같아서 오글거리기 짝이 없지만 이 외에 달리 찰떡같이 표현할 길이 없다. 또한 한국 귀국 후 회피하고 회피하던 건강검진에서 역시나 (90% 이상은 음주 때문일) 생애 최대 몸무게 달성 및 복부 지방과 비만 수치가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올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도 2024년을 기억하는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내년 말에 뉴스레터를 쓸 때면 아주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내가 되어 있기를 희망, 아니 약속해 본다.
하여간 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올해 마지막 뉴스레터에서는 알게 모르게 전통으로 자리잡은 연말 특집 뉴스레터답게 다른 친구들의 글이 주인공이다. 가장 좋았던 글을 뽑았다고 해서 다른 뉴스레터들이 그것보다 완성도와 내용이 덜 하다는 뜻이 결코 아님은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언급하고 지나가고 싶다.
- 지민
애초에 우리의 뉴스레터 타이틀이 ‘무임승차’인 것 자체가 서로의 문화적 경험에 무임승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즉 내가 직접 수고롭게(!) 찾아보고 가보고 읽어보고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이 나 대신 경험해주고 글을 써 준 덕분에 나는 무임승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뉴스레터의 진정한 목표 달성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내 의지로 과거 조상들의 무덤 스타일과 죽음에 대한 사유 등을 직접 찾아보고 글을 쓰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뜨뜻한 방에 누워 벽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무덤에 대한 역사를 나 대신 탐구하고 정리해 준 지민이의 뉴스레터에 무임승차할 뿐이다. AI가 사람을 대체하네 마네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죽음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란 인간에게 있어 항상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하물며 과학도 기술도 없던 고대 인류에게 있어 사후란 얼마나 두려운 세계였을까. 한 사회의 장례와 무덤 등의 풍습에는 분명 그 사회와 시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 의령
우리 또래들에게 있어 고 박완서 작가에 대한 기억 혹은 인상은 고1 국어교과서에 실린 <그 여자네
집>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고1때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그 여자네 집>으로 박완서 선생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내가 시간 내어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는 올드한 소설가, 이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올해 어느 날 인터넷을 하다가 자신의 아들 대신 딸
중 한 명이 죽었으면 덜 애통하고 덜 억울했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포함된 글로써 다시 박완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노년 세대에게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인권의식을 갖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는 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똑같이 자기 배 아파서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 속으로 혼자 생각하던지 아니면 사석에서 지인들끼리 한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그런 글을 공개할 수 있다는 것이 솔직히 더 신기했다. 이미 민주주의 사회였고 1가구에 1,2자녀로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을 받고 해외여행을 다닌 우리 세대가 전쟁을 겪고 군사독재를
겪으며 살아남은 우리의 노년 세대에 대해지금의 잣대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리 과거라 할 지언정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당연했으나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미 여초 커뮤니티 등에서는 ‘아들맘’들의 지긋지긋한 명예남성스러움이 밈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미 민주화된 사회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진출하는 것이 당연한 지금의 2030여성들에게 있어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부 아들맘들이란 일상생활에서
비껴갈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이며 그러한 경험을 축적하여 습득한 하나의 반사적인 경고등이다. 다행히도 그 글은
끝까지 읽어보면 아들의 죽음에 대해 자기 아들만 특별하고 딸들이 대신 죽었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가 아니고 그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바닥까지 대중에게
드러내면서 결론적으로 자신은 혼자가 아니며 주님이 있었기에 그 어둠이 어둠이 아닌 빛임을 깨달았다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커뮤니티에서 접하고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에피소드이기에, 의령이가 이 이야기와
더불어 박완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써준 뉴스레터가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나 나와 다르게 누군가의
엄마로써 그러한 글을 마주했기 때문에 더더욱 진솔한 생각이 궁금했고 또 귀중했다. 또한 고 박완서 선생의
다른 소설들에 대한 감상과 발췌는 그야말로 나의 무임승차다. 그저 교과서에서 배운 올드한 소설가쯤으로 선생을
기억하고 그 이상의 호기심은 없었던 내가 부끄러울 만큼.
- 혜리
비싼 영화 표값과 한국영화계의 자가복제를 한탄하며 극장에 직접
가는 일이 엄청나게 줄어든 요즘, OTT와 극장 사이의 간극은 비단 생산자 측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개봉하고 몇 주만 기다리면 금방 OTT에 뜨는데 굳이
내 시간과 돈(티켓에 더하여 영화관에 가서 부수적으로 쓰는 팝콘이라거나 영화 전후 따라붙는 외식이라거나 등)을 쓰며 극장에 가야 할 이유. 우리는 극장에 가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OTT시대에 영화관에 가는 행위에 대해, 그리고 OTT 대신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 대해 나 대신 사유하고 체험해 준 혜리의 글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사실
나는 위에서 내가 쓴 의문 즉 어떤 영화를 영화관에서 봐야 안 아깝고 어떤 영화가 아까운가? 에 대해 깊게
궁리하고 그것을 정리해서 남을 설득할 정도의 논리도 경험도 없었다. 사운드와 특수효과가 워낙 빵빵해서 극장에서
넓은 스크린으로 봐야 참맛이 느껴지는 류의 영화, 아니면 적당히 가족이나 연인과 주말 킬링타임하기에 좋은
CJ 감성 대작들이나 범죄도시 시리즈 같은 코미디류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혜리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유와 각각의 이유들에 걸맞은 영화 제시 및 분석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리끼리 보기는 너무 아까우니 조금 다듬어서 감상문 공모전 같은 데에 응모하여 세상에 알리면 어떨까 싶을 만큼.
물론
실제로 무릎을 치지는 않았고 역시나 방구석에 누워서 나는 절대 쓰지 못할 컨텐츠와 그 깊이와 문장력에 대해 열폭 및 감탄을 했을 뿐이지만.
앞으로도 친구들의 이런 글과 사유에 계속해서 무임승차하고싶다는 뻔뻔한 바람을 자신있게 말해 본다.
- 을
현실에서
이미 매우 잘 아는 사이이기에, 서로의 뉴스레터에 등장하는 개인사와 일상에 대한 내용은 실은 오프라인에서
나누기에도 무방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수다를 통해 듣는 일상과 뉴스레터를 통해 활자로 접하는 친구들의
일상은 실은 다를 바 없음에도 괜히 새로운 느낌을 준다. 가끔은 면대면 커뮤니케이션보다 활자로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정리해서 전달하는 일상과 생각이 더 인상깊을 때도 있다. 면대면으로는 만나는 장소,
시기, 그 당시의 분위기, 말투,
태도 등 수많은 비언어적 요소가 개입하지만 텍스트는 그저 담백하며 건조하다. 그래서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좀 더 편견이나 불필요한 비언어적 요소 없이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힘든 일을 먼저 하라>라는 책의 감상에 자신의 일상을 진솔하게 녹인 을이의 뉴스레터가 그러했다. 대부분 내가 쓰는 뉴스레터들이 나의 매우 한정된 문화생활 안에서 단순히 이 책은 어떤 내용이고 뭐가 재밌고 뭐가 부족한지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힘든 일을 먼저 하라>를 소개한 을이의 뉴스레터는 책과 화자의 현실을 솔직하게 접목하여 그야말로 친구와 실제로 나누는 대화 같았다고나 할까.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짐작하고 있는 친구의 실제 일상이 텍스트로 되살아나면서 다시금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어짐은 물론, 화면 너머 나에게도 아프도록 뼈 때리는 조언이었다. 업무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회피하고 머릿속으로만 실행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후회하는 짓을 3n년간 반복해 온 나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을이의 그 글은 올해 2월 뉴스레터였는데 2월에 읽어놓고도 결국 2024년 끝자락까지 전혀 나는 변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 뉴스레터를 쓰려고 1년 간의 무임승차를 쭉 되돌아보다가 이 글을 뽑고 그래,
적어도 오늘은 넘기지 말아야지 하고 정신 차리고 앉아서 마무리는 했다. 내년에는
미루느라 잔잔하게 불행해지는 일이 줄어들도록 노력해야겠다. 그치만 뉴스레터를 쓰느라 이미 오후
4시가 넘었으니, 원래 오늘 오후에 가려던 헬스는 내일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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