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요리하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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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는 오랜 세월 여자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미식이니 파인다이닝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 지도 오래되지 않았거니와 그런 세계에서조차 주인공은 남자이고 여자는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는 모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처럼. 1.5평 남짓한 좁은 주방 안에서 남편과 자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애써 차려낸 음식을 먹이고 나면 쌩하니 가버리는 가족들 뒤로 홀로남아 뒤처리를 하는 일까지, (우습지만 나 역시 그런 엄마의 희생과 가사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해소해 주지 못했으면서, 하지만 또 어쩌면 그랬기에)요리를 하는 일은 고통이라고만 생각했다 특히 여자에게는. 그래서 요리에는 아주 조금도 흥미가 없는 양 행동했다. 요리를 하는 건 내 자존심을 갉아 먹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책 속 요리하는 여자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음식을 만들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경건한 행위, 재료를 고르고(때로는 직접 구하기도 하고) 다듬고 집에 있는 손쉬운 양념들로 순식간에 맛을 낸 후 뜸을 들여 식탁에 내어 놓는 이 요리라는 과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한편 상냥하기까지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책 속 요리하는 여자들에 대해, 단순반복적인 가사노동으로서의 요리가 아니라 스스로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는 즉 요리라는 활동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과 그 능동적인 의미에 대해 써 보고 싶다.    사실 이를 주제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작년에 읽은 책 그레이스M.조의 “전쟁 같은 맛”에 대한 리뷰를 한번은 써 봐야지 했기 때문이다. 예전 호에서도 살짝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기지촌 여성이었던 한국인 엄마와 상선 선원이었던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내’가 엄마의 조현병 발병 이후 엄마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녀를 한 시대...

어쩌다보니 한달새 영화 세 편 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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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필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 유명한 추락의 해부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더 폴도 심지어 서브스턴스도 안/못 본 사람으로서, 늘 영화 앞에 서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좋아하는 걸론 안 되나? 미묘한 부채감이 오래도록 아쉬움으로 남아 앞으로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꼭 봐야지 다짐했다. 그리하여 '아노라'를 보았다.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 소개되었을 때 인상깊어서 봐야지 싶었는데 어영부영하는 사이 역시나 상영관들이 금세 흩날려버려 아쉽던 차. 무려 아카데미를 휩쓸며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서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이 영화를 단순히 요약하자면,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실상...정도일 것 같다.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노라는 클럽에 찾아온 재벌 2세 이반과 만나고 어쩌다보니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를 이반의 부모님이 알게 되면서, 서로의 방식과 방향대로 수습하고자 이리저리 날뛰는 이야기다.  나에게 '아노라'는 장점과 단점이 매우 뚜렷한 영화다. 장점은 웃기다는 것, 단점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고작 만 하루, 이반 부모님의 부하(?)들과 아노라는 목적은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인 채로 좌충우돌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쉴새없이 웃음이 터진다. 슬랩스틱과 사르카즘 사이에서 폭소와 어이없음의 웃음을 종횡무진하다보면, 김혜리 기자가 말한대로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싶은 지점이 온다. 그리고 반전이 없어 도리어 반전일 것 같은 후반부, 말 그대로 상황이 모두 '해소'되고 나면 막연한 허탈함과 적막함이 덮쳐오며 뚝 끊기듯이 엔딩 크레딧이 등장한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영화관에 불이 들어온 순간 이게 맞는 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워서 유투브에서 해석 영상을 여러 개 찾아보기도 했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다만 이 영화를 단순 B급 코미디가 아니게 만든 것이 엔딩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 미묘한 지점이 늘 나를 영화 앞에서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기...

넷플릭스에서 한국영화 이것저것 찍먹해본 썰 푼다.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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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가 잘 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OTT 로 넘어오는 요즘 , 영화의 가치를 극장에 가서 보느냐 마냐로 이야기하게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예전 같았으면 충분히 극장에서 개봉할 유명배우들의 영화도 OTT에서 단독개봉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한 편 값의 가치만큼을 꼬박꼬박 지불하며 돈과 시간을 쓰는 올드한 방식 으로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영화들도   한번   볼까 ?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보게 되기도 한다 .  쉽게 새로운 컨텐츠를 접할 수 있는 허들이 낮아진 만큼 이것저것 '찍먹'하기도 쉬워서 대중문화에 대한 편식이 고쳐지는 점은 실로 이 시대의 이점이라 하겠다. OTT시대의 이점을 한껏 누리며 그동안 넷플릭스에서 찍먹해본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감상을 공유해 본다. - 타겟  신혜선 , 김성균 등 A급 주연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B급 주연 정도는 될 배우들을 데리고 잘 못 만든 영화. 평범한 직장인인 여주인공이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사기를 일삼던 싸이코에게 잘못 걸리면서 일상이 무너지는 과정을 다룬 도시형 스릴러이다. 당근마켓의 성공 이후  스마트폰을 통한 개인 간의   중고거래가 비대면을 넘어 면대면으로도   자리잡은   요즘 시대에   딱 맞는  설정과 주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영화라지만 개연성 없고 현실성 떨어지는 전개, 예를 들어 당근에서 여자를 만날 목적으로 중고물품을 올리고 여자가 나올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 구매자를 꼬실 생각에 신나한다던지(인터넷으로 여자를 만날거면 데이트 어플을 쓰지 않나 보통?), 동일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같은 계정으로 사기를 반복하는데 잡히지 않는...

쇼츠로 보느라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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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의 자체 최고 기대작 넷플릭스의 폭싹 속았수다는 3월 한 달 동안 매주 4화씩 4주에 걸쳐 공개되었다. 캐스팅 소식과 공개 예정 소식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 년 중 가장 바쁜 3월에 공개가 되어 우선 시청을 미뤄두어야 했다.  아침일찍 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돌아와서 바로 잠들기 아까운 마음에 자기 전 1~2시간은 꼭 유튜브 쇼츠를 슥슥 밀어올리다가 잠들곤 했는데 90%는 폭싹 속았수다를 편집해 놓은 영상이라 드라마에 기대와 궁금증으로 가득 차있던 나의 마음은 매일 밤 쇼츠와 함께 울고 웃었다.   그래서 1화 부터 16화를 넷플릭스로 단 한회도 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70%정도의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말에는 시간에 조금 더 여유가 있었는데 드라마 본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당 주 방송분을 정리하고 분석한 후기 영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 했다.  특히 뭐랭하맨 채널과 김단군 채널은 매주 공개된 회차에 대한 후기가 올라왔는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챙겨 보았다. 뉴스레터를 쓰기 위해 겨우 넷플릭스를 켜고 각 화의 소제목과 설명글을 읽어보니  한 달 동안 쇼츠로 함께했던 영상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호로록 봄,  꽈랑꽈랑 여름,  자락자락 가을, 펠롱펠롱 겨울,  만날 봄.  오애순과 양관식, 특히 오애순의 삶의 계절들을 면면히 따라가며 보여주고, 그의 삶을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만들었던 수많은 주변사람들을 표현하는 드라마의 장면들이  마치 4D영화를 보는 것처럼 피부에 와닿았다.  쇼츠로만 보는데도 이렇게 스펙타클하고 절절한데 한 시간 안팎의 영상으로 여유있게 푹 빠져 본다면 쇼츠에 선택되지 못한 여러가지 장면들을 또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점점 더 커져간다.  어느덧 날씨는 따듯하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돌아왔고 봄의 한가운데에서 보는 폭싹 속았수다는 또 내게 어떤...

쓸쓸하고 찬란했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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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가족들과 함께 경주에 다녀왔다. 수학여행, 대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여행으로 찾았던 도시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봄의 경주를 경험했다. 뜨거운 여름날, 선선한 가을의 낭만을 기억하며 늘 다시 가고 싶은 도시였는데, 봄의 경주는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불국사 앞 정원: 불국사보다 불국사 주변에 더 심취했던) (경주 고속도로 톨게이트: 시간 여행이 시작되는 곳) (경주 벚꽃) 예전 어느 경주의 택시 기사님이 낭산은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셨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도 그곳을 가지는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다 보니 마음대로 동선을 짜긴 어려웠지만, 어쩌면 다음 경주 방문의 이유가 남겨졌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였다. 바닷가 가까이에 이렇게 장대한 이야기가 깃든 장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대왕암과 그 주변의 풍경은 쓸쓸하고도 처연했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죽음 이후에도 왜적으로부터 신라를 지키고자 수중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대왕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바다를 바라보니, 그의 죽음 앞의 두려움과 결의가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쓸쓸한 대왕암) (용을 기다리는 감은사지 석탑) (본래 이 앞까지 물이 가득찼다고 한다. 용이 드나들기 좋았던 감은사) (얼마나 오래된 나무였을까. 이 날 한 무희가 이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지) 그와 연결된 절터인 감은사지 . 그곳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지은 절로, 용이 되어 다시 육지로 올라와 후손들을 지키게 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은 이곳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염원과 사연은 오히려 더 깊게 전해졌다. 한때 찬란했던 왕조의 기운이 이렇게 조용하고 덤덤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허망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첨성대 도 이번 경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선덕여왕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