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 근데 이제 그 아는 맛도 아닌
예전에 떠돌던 다이어트 자극 문구, 짤 중의 하나, ‘먹어봤자 어차피 니가 아는 그 맛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는 맛이니까 맛있는 걸 알아서 먹고 싶은 건데 어쩌란 말인가? 어디에서나 규격화된 맛과 퀄리티가 보장된 프랜차이즈를 찾는 것도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창작물도 아는 맛이 친숙하고 편하고 무엇보다도 최소한의 퀄리티를 기대할 수 있기에 ‘믿고 보는’ ㅇㅇㅇ라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자는 무생물이 아니기에 프랜차이즈 음식처럼 항상 똑같을 수 없다. 잘 아는 맛이라서 오히려 항상 먹고 싶은 포테이토 피자를 먹으며, 이번 호에는 올해 접한 몇몇 유명 작가들의 '원래 알던 맛보다도 못했던' 리스트를 한번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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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정신자살>
집에서 가까운 대림도서관 대신 회사 근처 출퇴근 동선에 있는 강남구 작은도서관인 논현도서관을 주로 가기 시작하면서 논현도서관에 있던 도진기 소설을 다 빌려다 보았다. 그 중 변호사 고진 시리즈 중 한 권인 <정신자살>은 잘 나가다가 어이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서 기괴하고 기분이 나빠질 정도의 엔딩이었다. 역시나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해서 그런지 알라딘 독자 서평도 도진기 저서 중 눈에 띄게 낮은 편이다. 한국 추리소설 작가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도진기 아저씨인데… 나의(?) 도진기는 이렇지 않다능… 이런 약간의 흑역사 작품도 있었구나 싶어서 좀 인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읽은 <붉은 집 살인사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역시나 재미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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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리버
1,2>
한국에서는
<공중그네>라는 빅 히트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유명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꽤나 오랜만에 읽었다. 옛날에 공중그네 외에도 다양한 단편집과 장편소설을 꽤 여러 편 읽었었는데,
<나오미와 가나코>
이후 처음 보는 그의 스릴러 장편인 듯하다. 1,2편으로 나누어진 분량은 부담스럽기는커녕 워낙 쉽게 읽히는 대중소설에 능한 작가이기에 쉬는 날 쭉쭉 읽기에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오히려 기대가 컸다. 그러나 늘어지는 전개와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 특히 형사들 때문에 형사들은 누가 누군지조차 헷갈린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들 각자의 서사 때문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 1권을 몇 번이나 읽다 말다 했는지 모른다. 결국 2주간의 대여기간 동안 1,2권을 다 읽지 못해서 1주일 연장까지 하고 겨우 다 읽었는데, 책을 덮자 시간이 아까워서 짜증이 났다. 스릴러다운 숨막히는 추적도 없고 엄청난 반전도 없고, 이번 뉴스레터에 쓴 가가 형사 시리즈나 도진기의 장편에서 찾을 수 있는 사소한 단서들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극한의 논리도 없고… 최근에 작가 이름값만으로 선택했다가 후회하기에 딱 좋은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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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미야 시치리 <복수의 협주곡>
히기시노 게이고가 더 작가 생할을 오래 해서 그렇지, 활동기간이 비슷했다면 히가시노와 맞짱 뜰 만큼 다작을 하는 작가 나카미야 시치리. 다작하는 작가의 특징인지 역시나 작품별로 편차는 있지만, 내가 열광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도 지금 딱히 읽을 거 없을 때 시간 때우기 좋아서 일단은 어느 정도는 믿고 보는 편이다. 어느 날 당장 읽을 책이 없어서 강남구 전자도서관에서 <복수의 협주곡>을 읽었는데 이건 솔직히 최악은 아니지만 기대보다 밍숭맹숭했다. ‘개선한 악인’을 주제로 하는 미코시바 변호사 시리즈 최신작인데, 유아 연쇄살인범 그것도 소년범 출신이 진정으로 개심하여 변호사가 되었다는 매력적인 설정값에 비해 <복수의 협주곡>의 메인 사건 풀이는 치밀한 복선이나 트릭도 없이 맹탕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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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용의자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장르소설 쪽 작가인 정해연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용의자들>에서는 한 고등학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피해자 학생의 유족부터 담임교사, 친구들, 용의자과 그 가족까지,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던 가면을 하나씩 벗겨가며 각자 숨기고 있는 뒷모습과 비밀이 독자에게 드러난다. 추악한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라는 청소년들의 세계.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로 번갈아가며 전개하는 군상극을 좋아해서인지 오히려 누가 범인인지 여부를 떠나서 결말까지는 꽤나 재미있었다. 범인찾기 추리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일반적인 소설이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궁예지만, 왠지 모르게 작가도 소설을 쭉쭉 써내려가다가 범인의 정체와 결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도 우왕좌왕하다가 어영부영 끝내 버린 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결말은 재미가 없고 허무하다. 억측하자면 최근 장르소설 쪽 한국 작가들 중에 대중성에서 단연 주목받는 작가이다보니 신작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급하게 마감한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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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 시리즈의 가장 최신작이다. 부유층들의 별장이 밀집해 있는 교외에서 대량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은 완벽한 증거와 함께 자수한다. 그러나 물적 증거와 자백 외에는 범행의 동기도 순서도 모두 입다물고 있는 범인 때문에 피해자들의 유족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가가 형사는 지인의 초대로 유족들의 ‘검증회’에서 범행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진상에 도달한다.
일단 작품에 대한 감상을 떠나서, 텔레그램 등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상이 이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속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꽤나 감회가 새롭다. 이렇듯 스마트폰, AI 등 무섭게 발전하는 각종 기술이 사람이 만드는 고전적인 트릭과 단서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있지만 동시에 미스터리 분야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소위 황금시대 미스터리, 클래식 미스터리의 교과서인 외딴 공간, 한정된 용의자들이라는 클로즈드 서클 그리고 탐정 역인 가가 형사의 풀이까지,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했을지언정 최대한 클래식에 충실한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앨러리 퀸 < Y의 비극>을 섞은 듯한 만듦새. 범인의 정체 말고도 마지막에 더 큰 반전이 요즘 말로 ‘킥’이라 할 것.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에 비해 아주 실망이라고 할 정도는 전혀 아니고 특히 히가시노 본인의 컬렉션과 비교해도 망작, 졸작 반열에 넣을 정도도 아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 중 최고는 아니지만 보통 이상은 분명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기존 클래식한 미스터리의 틀을 깨는 신선하고 파괴적인 미스터리가 대세가 되고 80~90년대생 젊은 작가들이 대거 출몰하면서, 어지간한 미스터리 서클 + 범인찾기 미스터리는 이제 허를 찌르는 서술트릭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전개(예를 들어 전자는 구라치 준의 <눈 내리는 별장의 살인>, 후자는 다카노 유시의 <기암관의 살인>이 생각난다) 다소 평범하고 식상해졌을 뿐이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도 내가 속한 집단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게 보이는 것은 비단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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