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 후기

 


드디어 몇 년 간 품어왔던 투두리스트? 버킷리스트?를 해치웠다(!!)

그건 바로 바로... 템플스테이!


자고로 템플스테이란 산 넘고 물 건너 아주 깊고 고요한 곳에 숨어 마음을 정화하는 데 그 의의가 있겠지만, 이런 저런 것을 재고 따지다간 영원히 리스트에만 남아있을 것 같아, 일단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


몰랐는데 템플스테이라는 게 호텔처럼 방 있으면 상시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그 절의 사정이나 뭐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프로그램을 열어두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일정에 맞춘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바투 다가온 일정 때문에 가능한 곳은 하나, 서울 은평구에 있는 수국사였다.


홈페이지에서 신청하고 계좌이체로 입금하고 나니 다음날 확인 문자가 왔길래 됐나보다 했는데 얼마 지나 갑자기 전화가 왔다. 추가적인 안내인가 했는데, 나 혼자 신청했는데 괜찮냐는 것이었다. 예약할 때부터 나 1명인 건 알고 있었는데, 혹시 1명은 안 받아주나 싶어서 (뭔 식당도 아니고;) 안 되나요? 했더니 그건 아닌데, 1명이면 다른 날로 했을텐데 미리 알려주지 그랬냐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단다. 전 괜찮습니다, 하고 통화를 끊고 보니 머쓱했다.


회사 스트레스 디톡스 목적도 겸해서 연차를 냈고, 템플스테이 일정은 오후 2시에 시작하길래 조조영화를 볼까 은평 가는 길에 상수나 연희 쪽 느좋 카페나 좀 들러볼까 했는데 그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였다. 아침에 일어나 어찌어찌 하다보니 12시였고 집에서 수국사까진 한시간 반, 갈아타고 걸어가고 하는 시간을 넉넉하게 고려하면 2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허겁지겁 집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큰 문제는 없어서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어딜 거하게 들리긴 애매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절까지 걸어가야 해서 근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한 잔 해서 갔는데도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절 단지(?) 내에 건물이 여러 개가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사람이 있어보이는 곳에 갔는데 복작복작한 동사무소나 은행 같은 분위기였다. 좀만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니 옷과 생수 하나를 주며 길을 안내해주시며 또 그랬다. 오늘 1명인 거 전화 받았냐고, 말해줬다고, 그래서 또 혹시 절에선 혼자 오면 불편하신가요? 라고 눈치보며 물었는데, 그런 거 아니라고, 별 상관없다고 그러셔서 마음을 좀 놓았다. 사실 놓았다기보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요, 전 지금 왔잖아요, 싶은 마음에 가까웠지만...


방은 꼭 학생때 수련회 숙소 같았다. 유스호스텔같달까. 이불과 앉은뱅이 책상 말고 별 다른 세간살이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숙소마다 화장실은 하나씩 있었다. 공간은 제법 넓어서 (뭐가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만약 여러 명이 오면 한 방에 세명?까지는 잘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일단 난 혼자. 딱히 잠금장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 짐 놔도 되나 밤에 괜찮나 걱정이 되긴 했는데, 밤에 스님말고도 보살(?)님들도 몇 분 계신다고 그러셔서 그래 설마 절에서 도난이 일어나겠냐 어차피 귀중품도 없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가방을 최대한 구석에 숨기긴 했다)


회색 바지에 옥색 조끼까지 입고 대충 방이며 욕실이며 살펴봤는데도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오후 3시에 나오라고 스님이 안내해주실 거라고 했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남은 기분. 뒹굴거리며 책도 읽고 졸고 하다보니 2시 45분이었다. 어색하게 오라는 곳에 갔는데 풍채 좋은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이건 OT라고 하시면서 일정과 절 내부를 돌아다니며 알려주셨다.


수국사는 원래 정인사로 세조 때 지어졌으나 이후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수국사로 이름이 바뀌고 고종 때 재건증축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이 온통 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기둥을 슬슬 긁어보이셨다. 바닥도 금인데 보존을 위해 지금은 방석같은 것으로 다 덮어둔 상황. 신기하고 재밌으면서도 너무나도 속세스럽다는 생각을 지우긴 어려웠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바로 놓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그것은 본인을 돌아보고 정돈하는 마음이라고 하셔서 크록스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근데 나 말고 기도하러 오신 분들은 다 신발 제멋대로 두긴 하더라. 한 켠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는 곳이 있었고, 또 맞은 편에는 수많은 기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강, 합격 같은 것들. 욕망하지 않는 것이 가르침일 것 같은데 그 욕망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또 그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가르침 없이 무작정 욕망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테고 간절하기에 하늘의 힘 앞에 납작 엎드리되 기원하는 겸허한 마음같은 것일까 싶기도 하고.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뒤 수련실? 명상관? 같은 건물이 따로 있어 그 곳에 불을 켜고 스님과 마주앉았는데 그제서야 나 혼자여도 괜찮냐는 질문이 떠올랐다. 일대일 독대 너무 부담스러워. 넉살좋고 재미나게 티키타카를 할 수도 없고 그나마 모범생처럼 얌전하게 말씀 듣는 쪽이 낫긴 한데 너무 나 혼자여서 뭔가 호응이자 정답 같은 답을 해줘야 하는 부담이 컸다. 심지어 졸리고 애매하게 앉은 모양 때문에 다리도 아팠으나 티내긴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좋은 말씀 해주셨겠지만 잘 기억나진 않는다. 감정을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오 그렇구나 그렇지 하고 끄덕거렸는데 그런 건 안 된다고 하셔서 예???? 할 뻔. 중간에 내가 뭔갈 놓쳤나보다. 스스로의 부정적인 감정에 너무 빠져서 허우적 대지 말자 정도로 정리했다. 이제 끝났으니 근처 산책로도 가보고 쉬라고 하신 게 4시쯤. 저녁 시간은 5시부터인데 치울 수도 있으니 늦지 말고 빨리 가이씅라고 하셔서 천천히 절을 다시 둘러보았다. 사진도 찍고 부처님께 인사도 하고 식당 가는 길도 확인하고. 그래도 4시 45분인가 그래서 혹시나 싶어 슬그머니 부엌쪽에 얼굴을 들이밀어보니 어서 와서 식사하라고 해주셨다. 다행.


후기에서 봤을 땐 뷔페처럼 반찬들을 두고 난 접시에 내가 먹을만큼만 담아 먹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다보니... 내 앞에 그대로 냄비며 반찬을 그대로 주셨는데 그걸 다 먹을 수는 없어서 조금씩 다시 내 접시에 담아먹었다. 남기면 안 되니까 조금씩 담아서 먹고 조금 아쉬워서 한 숟갈씩 더 덜어서 먹는 데까지 채 15분이 안 걸렸다. 내가 먹던 것은 내가 치우는 것이 규칙.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끝내놓고 나왔는데 여전히 눈부신 낮이었다.


그리하여 호기롭게 뒷편의 산책로에 나섰다. 걷기 좋게 무장애 길을 만들어두셨다고 1시간이면 정상까지 본다 그러셔서 대충 크록스 끌고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길이 끈덕지게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1시간이 꽤 긴데 왜 만만하게 봤을까. 이쯤일까 싶은데 더 위가 있고 그래 이쯤이겠지 싶은데도 한참 더 남아있었다. 그래도 천천히 밀린 팟캐스트를 들으며 발을 움직이니 한결 나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데 눈에 담기는 풍경이 좋았다. 아름답다 하기엔 그냥 서울, 그것도 화려하지 않는 도시의 일면같긴 하지만, 역시 높은 곳에 오르는 맛은 이거지 싶었다. 물론 올라가서도 딱히 뭐 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니라 숨도 고르고 좀 쉬다가 내려오는데 또 아는 길이라 그런지 내리막길이라 쉬워서 그런지 부러 길을 돌아가는데도 시간이 별로 안 걸렸다.


문제는... 그새 내가 배가 고파졌다는 것이다. 템플스테이 후기 보면서 간식 사갔다 혹은 근처에 편의점에서 뭐 사먹었다 이런 것들이 있길래 왜 굳이...? 했는데 이런 거였나봐. 남길까봐 밥을 조금 덜어 먹고 심지어 일찍 먹었는데 운동까지 했으니 평소 야식같은 걸 먹지 않는 나라고 해도 입이 심심...해지는 어쩔 수 없는 일.


결국 지도맵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산책로 끝에서 절로 들어가기 직전에 조금 더 나가면 편의점이 있길래 그곳으로 향했다. 템플스테이 규칙 중에 밖에 나가면 안 된다는 항목이 생각나서 입고 있던 조끼는 슬그머니 벗어서 품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과자 한 봉지와 음료수 한 캔을 들고 돌아오니 조금씩 해가 지고 있었다. 시계는 아직 6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숙소의 문을 반틈 정도 열어두고 과자를 집어먹으며 핸드폰을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끈적한 기운에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에어컨을 켜고 이불을 폈다. 분명 아까까지는 하루가 너무 길었는데... 어느덧 한밤이었다. 이상한 시간 흐름의 체감... 그때 제대로 씻고 제대로 자야 했는데 대충 베개에 머릴 대고 폰을 하다보니 또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결국 5시쯤 눈을 뜬 것 같다. 원래대로면 일찍, 푹 자고, 5시 새벽예불에 참석하려고 했는데, 씻고 어쩌고 하려고 보니 시간이 애매했다. 음, 역시나 엉망이구만. 포기하고 나니 또 몸이 늘어져서 대충 씻고 7시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아침은 어제보다 더 푸짐하게 차려주셔서 또다시 송구한 표정으로 조금씩 덜어먹고 나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려나 싶었는데 절의 옷을 입고 그러기가 좀 죄송스러워서 숙소로 돌아가 우산을 챙겨와 절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식사 후 산책하는 거라 정말 세수만 한 채로 비몽사몽 걷는데 그 와중에 주말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분들이 많아서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잘 챙기고 이불이며 쓰레기며 싹 정리해두고 혹시 샤워하면서 빠진 머리카락도 안 남게 (이건 그냥 내 기분 때문에) 정리를 하고 10시쯤 나왔다. 체험형 아니고 휴식형인 데다 나 혼자여서 뭐 대단한 체험도 없었고 그냥 쉬다 온 거라 그런지 사실 대단한 감상이 있진 않다.


결론 : 딱히 디톡스도 힐링도 명상도 모르겠고 폰은 적당히 봐야 한다... 정도?


한 번 해봤으니 다음에 갈 땐 좀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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